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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자가 이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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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정종훈 기자 중앙일보 기자
정종훈 사회1부 기자

정종훈
사회1부 기자

지난달 26일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열린 5번째 촛불집회 현장에 처음 취재를 나갔다. 출근 전 두꺼운 점퍼와 내복부터 든든히 챙겨 입었다. 장인어른은 “조심하게. 경찰과 대치하는 곳은 특히 주의하고”라며 신신당부하는 전화를 걸어오셨다. 기사와 TV로 현장을 간접 체험했지만 살짝 긴장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막상 나가본 광화문광장은 춥지도, 위험하지도 않았다. 집회 참가자 150만 명 사이에 싸여 추위를 느낄 새도 없었다. 광장에선 쉼 없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수 양희은이 무대에서 직접 부르는 ‘아침 이슬’, 시민들이 거리에서 합창하는 ‘하야송’…. 거대한 콘서트장에 온 듯했다. 옆에 서 있던 ‘초딩’은 엄마 손을 잡은 채 춤을 췄다.

일주일 뒤 두 번째 취재도 마찬가지였다. 거리에는 LED 초와 핫팩은 물론 닭꼬치, 떡볶이까지 파는 노점상이 펼쳐졌다. 사물놀이패의 흥겨운 장단에 너나 할 것 없이 어깨를 들썩였다. 해가 진 뒤에도 다 함께 ‘떼창’을 하고 다 함께 ‘하야’를 외쳤다. 분노의 촛불을 손에 쥐었다지만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집회가 끝난 뒤 광화문 인근 술집에선 왁자지껄 한잔 걸치는 젊은이들의 뒤풀이가 이어졌다. 이날 만난 32세 서유민씨는 “집회를 다 같이 축제처럼 즐기기 때문에 편하게 많이 참여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예전에도 광화문 집회 취재를 여러 번 나갔다. 주최 측이 설치한 앰프에서 나오는 민중가요를 나도 모르게 되뇌곤 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폴리스 라인을 넘어 격렬하게 충돌했고, 경찰은 그때마다 물대포를 동원했다. 기자들은 몸싸움에 떠밀리다 물에 젖은 생쥐가 되곤 했다. 각 경찰서에 연행된 사람이 몇 명인지 물어보는 게 마지막 일과였다. 집회가 끝난 거리엔 희망 대신 분노만 남았다. 매주 집회가 이어져도 경찰 대치선 너머의 목적으로 다가가긴 어려웠다.

이번엔 달랐다. 6번의 촛불집회를 모두 합쳐 전국에서 641만 명(주최 측 추산)이 모였다. 하지만 연행자는 보이지 않는다. 해외 언론에서도 촛불집회를 앞다퉈 조명하고 있다. ‘즐기는 집회’라는 것이다. 토요일마다 ‘대통령 구속’ ‘즉각 퇴진’ 같은 정치적 구호에 ‘하야~순시려~’ 등의 풍자가 양념처럼 더해진다. 민중가요 대신 ‘나타나’ 같은 대중가요가 등장해 시국을 절묘하게 비튼다. 응어리를 아낌없이 풀어낸 다음날 광화문에는 쓰레기도, 미련이나 분노도 남지 않는다.

성숙한 시민들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분노를 살짝 돌려 표현하는 여유를 갖췄다. 많은 이가 부담 없이 참여하면서 공감도 커지고 집회 참가자도 나이 불문하고 늘었다. 분노와 대립을 비폭력과 흥으로 승화시킨 사람들은 ‘즐기는 자가 이긴다’는 진리를 보여주었다. 즐기는 촛불집회의 구호는 어느덧 현실이 되기 직전이다.

정 종 훈 사회1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