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선 2035

불쌍해야만 살아남는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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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구혜진 JTBC 사회1부 기자

구혜진
JTBC 사회1부 기자

초등학생 때 아래층에 살던 친구 아빠가 돌아가셨다. 길에서 싸움을 말리다 급소를 잘못 맞아 하루도 못 넘기고 돌아가셨다고 했다. 며칠 뒤 문방구 앞 오락기에서 친구를 만났다. “유감이다” 같은 어른스러운 표현은 모르고, “괜찮으냐”고 조심스레 물었는데 주먹으로 한 방 세게 맞았다. 또 다른 친구도 비슷한 말을 건넸다가 맞았다. 억울해 죽을 것 같았다. 위로를 펀치로 갚다니. 그를 이해한 건 남의 동정이 굶는 것보다 싫은 나이가 되어서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친구는 새아빠가 사준 신발을 자랑하긴 해도 돌아가신 아빠가 있다곤 말하지 않았다.

반면 박 대통령의 삶에 뒤엉킨 혼란과 불행은 강력한 무기였다. 2012년 대선 당시 TV 광고, ‘박근혜의 상처’편은 60초 중 50초를 커터칼 피습을 당했던 박 후보와 그녀의 흉터를 보여주는 데 할애했다. 흉터의 길이와 깊이가 표로 이어진단 걸 알았기에 조명도 깊었다. 부모님을 ‘여의고’ 보낸 고통의 세월도 선거 내내 언급됐다. “너무 불쌍해서. 5년 만이라도 대통령 해봤으면 좋겠어.” 많은 이들은 표를 줬다. 이번 게이트의 와중에 박 대통령은 ‘불쌍함’ 카드를 또다시 꺼내 들었다. “가족 간 교류마저 끊고 외롭게 지내왔다”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주었다”고.

대표 친박 의원인 이정현 대표도 ‘불쌍함’의 힘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다. “저도 우리 경상도 의원들처럼 박수 한번 듣고 싶었습니다!” 지난여름 당 대표 선거에서 호남 후보로 겪은 설움을 토해내던 이정현 대표는 단연 화제였다. 그는 동정표만으로 당 대표가 될 수 있겠느냐던 우려를 불식시키고 당선됐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청문회에서 김영한 전 수석의 비망록 내용이 언급되자 3년 전 교통사고로 의식불명이 된 아들을 언급했다. “내 자식도 죽어 있는 상태인데….”

삶의 질곡으로 사실을 반박할 순 없다. 시련이 능력을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불쌍함을 배배 꼬아 늘려야만 부도덕함과 무능을 덮을 수 있다는 걸 정치인, 재벌 총수나 흉악범들은 알고 있다. 불쌍함을 광고하는 이들은 실제로 불쌍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평범한 사람들, 이 세계의 불쌍함에 지분이라도 주장해볼 수 있는 사람들은 크고 작은 불행을 감추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불행을 감출 마지막 힘조차 떨어졌을 때만 벌어진 상처를 내보인다. 자기 사정 한 번 호소 않고 마지막까지 ‘죄송하다’며 70만원을 남긴 송파 세 모녀가 그랬다. 졸업 후 불합격 e메일만 쌓여 가는 20대들이나, 출근 버스에 타서야 간신히 립스틱을 바를 수 있는 워킹맘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불쌍함을 광고하는 사람들이라니, 이보다 큰 사치가 없다.

구혜진 JTBC 사회1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