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병욱<편집부국장>현실을 인정하는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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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묘·병자의 두 호란은 오랑캐로 하시하던 야인들이 강성한 세력을 형성한 현실에 눈을 감다 불러들인 참화였다. 불각시에 당한 정묘호란은 그렇다 하더라도 9년만에 또다시 당한 병자호란은 그야말로 자초지화였다.
전란을 겪고도 중원의 명나라를 멸망시켜가고 있는 신흥세력의 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오랑캐라는 업신여김의 타성과 오랜 종주국으로 왕신난때 구원병을 보내준 명에 대한의리와 사대의 명분이 국제정세의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상대와 스스로의 엄청난 힘의 격차를 인정하지 않고 정신없이 척화의 외길로 치닫다 전란을 불러들이고만 것이다. 현실의 대지 위에 발을 붙이지 않고 선입견과 명분의 구름 위에 떠있던 정치가 가져온 참화였다.
이상이 없는 정치는 방향이 없는 항해와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정치의 입지는 어디까지나 현실이다. 현실을 바로 보지 않고 현실문제를 해결해내지 못하는 정치는 이미 정치라 할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명분의 구름 위에 떠 현실문제 해결을 외면하는 성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작년 4월30일 이후 1년 가까이 우리 정치는 민주개헌을 이룩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맞았었다. 그러나 권력 구조를 둘러싼 대통령직선제와 의원내각제의 명분 싸움과 권력측의 일방적 개헌유보조치로 이제는 개헌의 전망조차 할 수 없게 돼버렸다. 일이 이토록 꼬인 건 정치인들이 현실을 현실대로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내건 명분만 고집했기 때문이다.
집권측으로서는 야당의 현실을 직시하여 당론 결정에 영향력을 지닌 힘있는 사람들과 협상을 시도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또 야당 쪽도 설혹 집권과정의 정당성에는 이론을 제기하더라도 현실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힘의 실체를 인정, 단계적인 목표를 세웠어야 했다. 집권측이 당장 권력을 내놓으라는 것으로 생각하는 대통령직선제 외길만을 고집하면서 다른 길을 모두 막았으니 무슨 해결책이 나오겠는가.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나온 개헌유보조치에 대해선 학계·종교계를 필두로 반대성명이 계속되고 있다. 또 대통령제를 독재 위험이 있는 제도로 매도해온 집권당 국회의원, 개헌이 될줄로 믿고 여야의 타협을 촉구했던 개량주의적 지식인들이 모두 난처하게 되어버렸다.
국민저변에는 이것이 혹시 민주화의 시대 정신에 역류하려는 게 아니냐하는 의구심이 상당히 번져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런 의구심을 현실로 인정하고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지방자치제의 동시실시, 석방, 사면·복권등 눈에 띄는 민주화조치와 앞으로 개헌에 대한 확실한 전망인데 아직은 그 기미가 너무 미미해 답답하기 그지없다.
개헌 유보의 한 요인을 제공한 야당의 분열로 이제 정치판세는 다시 2·12총선 직후의 4당제로 회귀했다.
집권측에선 새로 제1야당으로 등장한 강경투쟁 이미지의 통일민주당을 평가절하하고 가급적 상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내비치고 있다. 3개 야당중의 하나, 총 국회의석의 4분의 1로만 대접하겠다는 것이다. 제1야당의 총재나 총무를 별격으로는 상대하지 않고 수명중의 한명으로만 만나겠다는 얘기도 들린다. 상대적으로 나머지 두 「온건」 야당에 대해선 싸고도는 분위기다.
집권측의 그런 기분은 알만하다.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고 상대하기 버거운 세력이 왜 불편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밉다고, 불편하다고 해서 국민의 반대의사를 대표하는 제1야당을 무시하는 건 국민의 상당수를 무시하는 일이 된다.
야당이 집권세력의 조직력·강제력·법집행력을 인정해야 하듯이 집권측도 제1야당과 그 대표의 실체와 그나름의 정치적 힘을 인정하고 들어가야한다. 그것은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인 여러 문제를 보다 원만히, 소리가 덜나게, 국민들이 보다 납득할수 있게 해결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제1야당이 정치권에서, 국회에서 제몫의 기능을 다할 수 없게된다고 하면 결국 갈곳이 어디겠는가.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려들 것이다. 그렇게 장외로 나갈 경우 사법대응을 하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야당을 장외로 내몰았다는 비난은 어찌하겠는가.
따라서 정치의 문제 해결 기능을 높이면서 야당의 장외투쟁을 억제하고, 또 어차피 장외투쟁으로 나갈 경우 집권측에 올 비난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서도 야당의 현실을 현실대로 인정하는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 융통성은 야당도 마찬가지다. 당분간은 갈라서는 과정의 원한때문에 집권당에 대해서 보다 갈라선 야당간의 감정이 더 나쁠 것이다. 민주당창당대회에 보내온 집권당 대표의 화환은 잘 모셔놓으면서 신민당총재의 화환을 짓밟아버린데서도 이런 감정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악감정이 지속되어서는 보기에도 좋지 않고 서로간에 정치적으로도 득될 것이 없다. 제1야당으로서는 다른 야당들을 선명하지 못하다고 몰아치거나 수가 적다고 무시하러들지 않는 게 좋다. 또 다른 야당들도 집권당의 호의를 빌어 제1야당을 따돌리려 한다면 그같이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강력한 집권당을 상대로 야권이 힘을 합해야할 때도 많을 것이고 우리나라 야당사에 비추어 언제 또 범야통합론이 나올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니 야당 상호간에 서로를 현실대로 받아들여 지나친 척은 지지 않도록 하는 게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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