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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대지(26)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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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덕>이는 한의 영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에 비장 홀이와 천호장 온수리가 동검을 빼어 덕이를 호위하며 따라 들어갔다. 영막 가운데는 화덕이 있고 주위에는 부드러운 가죽으로 간막이가 둘러져 있었으며 맨 안쪽에 화려한 호랑이 털로 장식된 평상이 있었으며 양쪽에 한의 번쩍이는 가죽방패와 창이 엇갈려 세워져 있었다. 덕이는 칼을 빼어 평상옆에 둘러친 가죽 간막이를 주욱 찢었다. 그곳은 아녀자들이 기거하는 곳인지 털가죽과 깔개가 화려했다. 여자들 셋과 아이들이 한테 뭉처진채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덕이는 조용히 말했다.
해치지 않는다. 밖으로 나오라.
그러나 아녀자의 덩어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온수리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끌어내기 전에 어서 나오라니까.
덕이는 손을 들어 온수리의 다음행동을 제지하고나서 홀이에게 말했다.
다루를 불러 말하게 하라.
곧 다루가 영막 안으로 들어왔고 덕이는 다루를 통하여 다시 아녀자들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밝 종족의 청구 사람이다. 너희를 해치지 않겠다. 이리 나오라.
여자들이 고개를 살그머니 들었다. 그중의 하나가 또렷한 밝의 말로 말했다.
우리는 셋이 모두 한의 안해들입니다. 해치지 않는다면 우리를 우리 고향으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대는 밝 종족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어릴적에 부모님들이 여기 끌려와 여기서 자랐읍니다. 고죽 사람입니다.
다른 두 사람은 동호족인가?
예, 이들은 동호족이고…저도 동호가 분명합니다. 내 아이도 동호입니다.
덕이는 눈이 빛나며 얼굴이 하얀 그 여자를 바라보며 문득 아름이를 떠올렸다. 그렇다, 동호와 살을 섞어 그 아이를 낳았으니 그는 동호의 어머니가 된 것이 아닌가.

<이>곳에 동호족의 안해가 된 밝의 여인들이 많이 있는가?
많이 있읍니다. 또한 그저 같은 부족 사람끼리 부부로 있는 이들도 더 많지요.
사내들도 많이 있는가?
이 삼백명쯤 있지만, 그들은 거의가 종입니다.
덕이는 울컥, 하면서 노기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동호 놈들은 우리네 사람들을 잡아다가 종으로 부렸는데, 내가 너희들을 그냥 보내 주어야 하느냐?
고죽족의 여인이 대꾸했다.
그것은 장수의 뜻에 달린 일입니다. 그러나, 동호는 남의 땅을 칠때에 그곳 우두머리의 식솔들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거짓말 마라. 너희끼리는 그러겠지. 너희들의 백장하나가 몇 년 전에 우리 고장을 침략하여 내 아버지를 살해하고 온 가촉을 종으로 끌고 갔다. 나도 여기서 종노릇을 하다가 예의 땅으로 팔려갔던 사람이다.
여자는 고개를 숙였다. 덕이는 뒷짐을 지고 돌아서서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다시 나직하게 말했다.
해치지 않겠다고 이미 말했다. 그러나 한의 장자는 우리가 맡아 둔다. 너희는 대읍 조양으로 돌아가 이 소식을 알리라. 우리는 곧 그곳을 칠 것이다.
덕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인이 울음을 터뜨렸다. 아마도 장자를 낳았던 모양이었다.
모두 끌어내어 한의 맏아들만 남기고 말과 담가에 먹을 것을 실어서 이들을 보내 주어라. 그리고 검바우에게는 전갈을 보냈는가?
덕이 물었고 홀이가 답하였다. 예, 지금쯤 인근 큰 마을들을 공격하고 있을 것입니다.
외곽을 경비하고, 포로들은 동호와 밝 사람들로 나누어서 자세한 사정을 알아 두어라. 또한 포로들 중에 살아남은 적의 백장이나 우두머리들을 모두 영막 앞에 모아 두어라.
곧 시행하겠읍니다.
또한 저들의 재물이 얼마나 되며 가축은 얼마나 있는지 빨리 셈하여 알리도록 하라. 다루는 병사들을 데리고 이 길로 출발하여 저들의 구리산을 둘러보고 오라.
홀이 온수리 다루 등이 명을 받고 뛰어 나갔고, 다른 병사들이 영막의 주위와 안에 무기를 치켜들고 보초를 섰다. 덕이는 영막안의 여러 간막이들을 둘러 보았다. 여인들의 장신구가 담긴 궤와 가죽옷 천옷 등속이 가득하였고, 곡물과 말린 생선, 말린 고기 따위의 월동 찬거리가 잘 정돈되어 있었으며, 질 좋은 모피들이 수십장이나 되었다.

<전>쟁은 처참한 것이지만, 이긴 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가져다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하얀 이리의 정벌은 덕이의 삼천 군사의 전비와 말모루 애처의 물산의 한계를 대번에 해결시켜 주었다. 가축가운데서 말은 기병을 늘려줄 것이며, 소나 양은 충분한 식량이 되고, 여기서 잡은 포로들은 말모루로 데려가 드넓은 삼림을 개간시켜서 새로운 농경지를 확보하게 될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여기서 대량으로 캐어낼 구리는 전 군사의 무기를 강화시켜 줄 것이었다. 비장 홀이가 들어와 아뢰었다.

<방>금 동호족 한의 식솔들은 동북방으로 떠났읍니다. 동호족 포로들은 이천오백여명입니다. 그리고 밝 사람들은 종이 되었던 남자들이 삼백여명, 동호의 계집이 되었던 여자들이 백여명입니다. 한을 포함하여 천호장이 셋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과 천호장 하나가 죽고 한사람이 살아 남았읍니다. 백장은 모두 열여덟 명이 남았읍니다. 지금 영막 앞에 모두 묶어서 모아 두었습니다.
수고했다.
덕이는 홀이의 뒤를 따라서 영막 앞의 널찍한 빈터로 나갔다.
과연 동호족의 억센 장수들이 뒤로 양손을 묶인채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홀이가 뽑아둔 밝의 사람 하나가 홀의 옆에 붙어서서 그의 말을 통역하였다.
청구의 한이시다. 모두 머리를 숙여 절하라!
고개를 들고있던 자의 등짝을 덕이네 선비군 백장 하나가 채찍으로 후려갈겼다. 채찍은 동호족의 것이었다. 동호족들은 모두 어깨를 숙이고 머리를 땅에 대었다. 덕이가 적의 장수들을 향하여 나직하게 말을 시작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맹수의 으르렁대는 소리처럼 그 소리는 단호하고 빈틈이 없었다.
이곳은 일찌기 우리 조상들의 땅이다. 저어 남쪽에 보다 기름지고 살기좋은 땅이 있어 우리가 잠깐 비워 두고 있었다. 그런데 너희가 초원을 따라서 여기까지 침입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 종족은 싸움을 좋아하지 않아서, 너희들이 그냥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남의 땅을 빌어 쓰는 자가 주인의 은의를 모르고 오히려 욕심이 넘쳐서 너희들은 우리네 부족들의 북방마을들을 약탈하고 괴롭혔다. 이제 우리는 주인으로 이 땅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너희들은 여기서 멋대로 살아왔고 우리 여러 부족들의 살림살이를 망쳐 놓고 온갖 것을 다 빼앗아 갔다. 우리는 땅과 재물을 되찾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너희를 종으로 삼아 오랜 빚을 받아내려고 한다.
장수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고개를 들고 외쳤다. 밝의 사람이 그의 말을 전하였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답니다. 동호족답게 죽도록 해달랍니다.
저 자는 누구인가?
덕의 물음에 홀이 말하였다. 그가 바로 하나 남은 천호장입니다.
덕이 천호장에게 물었다. 어떤 죽음을 원하는가?
대초원의 방식대로 전사답게 죽여 주시오. 전사가 싸우지 못하고 죽을 때에는 피를 흘리는 것은 더러운 일입니다. 광야에 산채로 묻어주면 고맙겠소.
덕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묶어있는 백장들의 사이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는 드디어 중간쯤에서 그 자를 찾아내어 칼끝으로 턱을 치켜 올렸다.
나를 기억하겠는가?
모른다.
덕이는 꿈 속에서도 자주 보았던 그자의 얼굴을 떨리는 칼끝으로 치켜올리고 있었다.
몇 년 전에 네가 청구 갈래강부근 마을을 습격했다. 거기서 나는 네게 잡혀 끌려왔고, 내 안해와 어머니와 동생들이 이리로 끌려왔다. 모르겠는가?
그랬던가?
하더니 동호의 백장은 껄껄 웃었다.
너는 참으로 호랑이같은 장수다. 과연 광야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군. 나는 그런 일이 하도 많아서 다 잊어버렸다. 네 가족들은 사방으로 팔려 갔거나 우리 대읍에 갔거나 했을 것이다.
덕이는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천제(천제)를 지낼 것이며, 너를 제물로 쓰겠다.
그는 영막 안으로 되돌아 갔다. 홀이와 온수리가 따라 들어왔다. 덕이가 말했다.
천호장 이하 백장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어라.
온수리가 아뢰었다.
한혈마가 팔백 필입니다. 소가 백여마리, 양이 오천여 마리입니다. 저들이 비축해 두었던 마른고기와 양곡은 우리가 동호에 머무르는동안 전군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을만큼 되는 셈입니다. 큰 재산입니다. 이것으로 몸을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덕이는 다시 홀이를 시켜 갈래말에서 잡혀온 청구 사람이 있거든 찾아오라고 하였다. 이윽고 한사내가 영막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는 먼 친척뻘이 되는 한 마을의 중년남자였다. 얼굴이 검게 그을고 손과 발이 거칠어졌으며 광대뼈가 불쑥튀어 나왔지만 오히려 덕이는 그 사내를 얼른 알아 보았고 그는 덕이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덕이는 얼른 일어나 마주 달려 나가며 그의 손을 덥석 잡고 말하였다.
아저씨, 접니다. 덕입니다.
사내는 두려워하며 뒤로 물러섰다.
저는 모르오. 제가 어찌 한님을 알겠읍니까.
저, 덕이입니다. 갈래말 큰돌수장의 아들 덕이예요.
큰돌? 갈래말?
그래요.
사내의 입술이 삐죽이 일그러지더니 눈물이 흘러내렸다.
암, 알지. 알구말구. 자네가 이렇게 훤칠한 장정이 되었구만.
다른 분들은 여기 안계십니까?
젊은 것들은 다 뽑혀서 다른데로 끌려가 버리고, 젊은 여자들도 다 갔지. 그리고 나이든 것들만 여기 남았다네.
제 어머님은요? 동생들은…그리고 아름이는….
사내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 어머니는 얼마후에 여기서 돌아가셨어. 그리고 자네 안해
와 동생들은 대읍으로 끌려갔지.
덕이는 그에게서 더 이상 알아낼 것이 없었다. 그는 몇년 동안에 갈래말에서의 여러가지 일은 거의 잊고 있는 듯 했다. 모두 청구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얘기해주자 그제서야 소리를 내어 엉엉 울었다.
검바우의 전령이 말을 달려와 강변인근의 동호족의 큰 마을들을 모두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알렸고 거기서도 백여명의 밝 종족 사람들을 찾았다고 전해왔으나 갈래말 사람들은 없는 듯 하얀 이리를 치고 사흘이 지나서야 일이 제법 정돈되기 시작하였다. 다루가 둘러본 구리산은 하얀 이리에서 서남쪽으로 유족의 땅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바위 절벽가에 무진장으로 달라붙어 번쩍이고 있더라는 얘기였다. 반나절 거리였으니 하루에 내왕하며 대량으로 실어올 수가 있을 터였다. 덕이네는 이곳을 쳐서 점령하였으므로 이 읍의 지형적 장점과 약처를 잘 알게 된 셈이었다.
우선 북편의 샛강 쪽에는 호를 파고 그 앞에 토벽을 쌓고, 그들이 건넜던 여울목에는 날카롭게 깎은 장목을 세웠으며 언덕 위에는 돌담을 쌓기로 하였다.
무성한 덤불과 갈대숲은 맞불을 놓아 태우고나서 갈아 엎기로 하였고, 서쩍의 드넓은 통로에는 목책을 두 겹으로 세우도록 하였다. 동쪽은 강이 휘돌아 샛강과 만나는 지점이라 십여명의 정찰대를 교대로 내보내기로 하였다. 또한 동호는 척후를 활용하는 재주가 뛰어났으니 이쪽에서도 다섯씩 오를 이룬 기마전사를 척후로 뽑아 여러 대가 일정한 지역을 돌아서 귀환하고 또 다른 패가 떠나고 하여 움직임이 끊임없도록 하였다. 온수리가 군사를 내어 포로들과 밝족 사람들을 이끌고 말모루로 떠났다.

<하>얀 이리에서는 새 풀이 나고 있음을 알았고 이런 철에는 조양이 보통때보다도 한산해져서 마치 빈집이나 한가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방심할 수는 없는 것이 척후들의 보고에 의하면 백여명 안팎의 동호족 소부대들이 끊임없이 조양을 향하여 이동중이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조양에서도 이곳 소식을 알고 병력을 모으는 중인 듯 하였다. 다루는 큰소리를 쳤다.
제깐 놈들이 아무리 그래봤자, 비 오고 새 풀이 나면, 이 근방에서는 모를까 좀 떨어진 지방의 동호들은 벌써 서쪽의 기름진 초원으로 떠났을 게요. 아니, 안떠났다 하더라도 가축을 내버리고 조양을 구원하러 달려올 놈들은 얼마 안될걸. 저놈들은 큰한조차도 여러 곳에 대읍을 두어 철철이 돌아다니며 다스리거든. 한 혈족 단위로. 숙영지를 이루어 다니다가 모여서 숙영지를 이루면 그것이 읍이 되어 버립니다. 하룻밤에 읍을 이루었다가 하룻밤에 빈 광야로 변하는 판이니까.
우리가 조양을 치기 전에 나를 유족의 땅에 보내 주시오.. 내가 기병을 이끌고 가서 유족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그들이 서쪽의 통로를 막아줄게요. 그러면 우리는 마음놓고 동북방을 칠 수가 있읍니다.
덕이는 다루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기병 이백여를 떼어 주어 유족 땅으로 가도록 하였다. 다루는 고향으로 갈때에 양과 소를 수백마리 가지고 갔으니 그들의 병력에 필요했던 까닭이었다.

<그림 강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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