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서글픈 코미디|권택영<복?대·영문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농부들이 「미자」를 해치웠어』
소설이 끝없이 길게 쓰여져 있어도 반갑게 읽히던 시절 읽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 『카라마조프의 형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물론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그토록 긴 서술의 매듭치고는 너무 갑작스럽고 퉁명스럽고, 그리고 무엇보다 아리송하다. 도대체 작가는 무얼 말하려는 거야? 부패한 지주계급에 대한 농민들의 승리라는 얼핏 유혹되기 쉬운 해석을 내리기에는 마음이 편치않다.
그러기에는 「미자」가 결백하고 그의 격정적인 사랑까지도 인간적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한동안 이 사람 저 사람을 건드리다 보면 문득 이것이 바로 「도스토예프스키」가 노리는 효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혼자 이리저리 주물러서 『이것이오』하고 내놓는게 아니라 짐짓 물러서서 반쯤만 내놓고는 독자를 끌어들여 『나머지 반쪽은 당신이 엮어내시오…』라는 방법이다.
외국어를 배울 때 가장 이해가 늦는 부분은 코미디다. 뉴스보도나 진지한 담화보다 코미디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것이 듣는 이의 상상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수준 높은 코미디언은 늘 반폭만 이야기하고 나머지 반쪽을 듣는 이에게 맡긴다. 따라서 웃는 몫은 듣는 이의 것이지 코미디언의 것이 아니다. 그는 말 때문에 웃는 게 아니라 그 말이 암시하는 것 때문에 웃는다.
이 간접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순간은 말하는 것의 암시가 으례 그러려니 하는 독자의 통념을 깨뜨리는 순간이다.
그러기에 가장 질 낮은 코미디는 같은 행동을 두번쯤 반복하여 그 다음 무슨 행동을 하려는지 뻔히 알게되는 식의 것이다.
같은 행동의 반복이나 소리소리 지르며 싸우는 장면, 거친 말씨나 행동, 그리고 바보같은 표정으로 우리를 웃기려는 코미디는 웃음대신 분노를 터뜨리게 한다. 우리의 의식수준이 너무 얕보임을 당하는 것 같아서다.
가끔 TV를 지켜보면 자기들끼리만 우는 드라머나 자기들 끼리만 웃는 코미디가 보는 이를 외롭게 한다. 도무지 시청자의 상상력을 존중하는 기색이 없다.
한 나라의 코미디를 이해하게 되면 그 나라의 정치와 문화, 그리고 국민의 의식수준까지도 가능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의 의식수준을 몰라주는 코미디가 야속한 것은 단지 웃을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정치와 문화의 또 다른 척도이기 때문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