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준 「범양사건」 중간정리(기자방담)|"투서·음해풍조 뿌리 뽑아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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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 국내 최대 해운사인 범양상선 박건석 회장 투신자살사건이 발생 1주일 째로 접어들며 일파만파의 파문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국세청의 조사가 대체로 마무리돼 금명간 검찰수사가 될 것 같습니다. 그 동안의 취재와 뒷얘기들을 중간 정리해보도록 하지요.
- 이번 사건은 제5공화국 들어 터진 이-장사건·명성사건·영동개발사건 등 대규모 금융부정사건에 이은 또 다른 대형 경제사건입니다.
- 증시에서는 이번 사건을 정치적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박회장이 재야의 모중진편이고, 한사장은 여권의 어느 의원측이라고 봐서 정치적 문제로부터 시작됐다고 보더군요. 투서에도 박회장을 재야와 손잡은 것으로 모함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 이번 사건은 오너와 전문경영인간의 갈등을 표면적으로 노출시킨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재계에서는 이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면서도 거론은 금기사항으로 돼있다고 해요.
- 투서나 음해(음해)풍조는 이체 근절돼야 한다는 여론도 높습니다. 투서당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투서한 본인까지도 함께 죽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니까요. 수사기관도 익명의 투서는 수사하지 않겠다고 여러 번 강조하지 않았습니까. 서로의 견해차나 갈등이 있다면 정정당당히 따지고 대화로 풀어나가야지요.
- 어느 해운업계원로는 『투서를 당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고충을 모를거라면서 그러나 이같은 투서풍조의 근절과 함께 기업인이 스스로 주위를 깨끗이 하도록 노력해야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 업계에서는 해외에서 사업을 하자면 리베이트(사례금) 등 정상 처리할 수 없는 부분도 적지 않다며 이에 대한 정책적 배려도 시급하다고 지척하기도 해요.
구멍가게식 경영시대가 지났기 때문에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도 더욱 그렇다는 설명입니다.
- 현재까지 국세청 주변서 흘러나오는 조사결과를 종합하면 외화도피액은 2천만달러 선으로 박회장과 한사장이 대체로 반반씩 나누었으며 한사장의 탈세액만도 5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 범양상선이 유출한 외화의 대부분이 79년 말부터 도입한 7척의 벌크선 구매가 차액에서 나왔지만 회사가 경영난에 빠진 81년 이후도 외화도피·회사재산 빼돌리기는 계속됐어요.
- 국세청은 이번 조사틀 맡으면서 「송장치고 살인낸다」는 속담까지 인용, 박회장의 죽음이 국세청조사와는 무관하다고 애써 강조했습니다.
- 그러나 범양의 한간부는 박회장이 국세청조사로 거액의 외화도피와 탈세가 드러날 경우 자신의 명예가 크게 훼손되는 것을 두려워 한 점도 자살의 한 동기라고 말하더군요.
- 범양 한사장의 박회장 축출쿠데타계획은 거사예정 하루 전 박회장이 자살함으로써 실패했다는 후문입니다.
해운항만청이 두 사람을 각각 따로 불러 협조할 것을 종용하고 있는 가운데 한사장측은 박회장을 음해하는 투서를 보냈고, 두 사람이 항만청에서 만나기로 한 20일을 박회장 퇴진 공개요구일로 잡았다는거죠.
박회장은 자살 전날에 은밀히 진행된 연판장 내용을 측근으로부터 들었고, 16일 국세청에서 투서내용에 대해철야조사를 받은 충격을 못 이겨 20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살을 결행한듯 합니다.
박회장은 마지막까지 경영권에 도전하는 사장파에 둘러싸여 홀로 고군분투했다고들 합니다. 더구나 투서로 외화도피사실이 밝혀지자 법정에 설 경우 어느 누구도 박회장에 대해 유리한 진술을 해 줄 사람이 없게되자 투신자살이란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지 않겠느냐고 추측하는 사람이 많더군요.
- 한사장은 아마 범양상선이 자기회사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던 것 같습니다.
66년5월28일 범양전용선이 창사되기 전 65년 하반기부터 박회장과 사업계획을 짠데다 열심히 일하면서 사원들의 반발을 받읕때마다 박회장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에 그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는 얘기죠.
- 사건의 파장은 여러곳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크게는 정부의 부실기업정리 정책에서부터 작게는 위장여권발급경위까지 캐나가면 문제가 하나둘이 아니라는거죠.
항만청·재무부·조달청·주거래은행·국세청 등 유관부서가 모두 전전긍긍하는 분위기지요.
- 정부측에서 보면 이번 사건은 그야말로 한밤중의 날벼락이었습니다. 해운에 대한 합리화조치로 일단 부실기업정리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마당에 이런 일이 터지니 단자사의 어음상환을 연기시키고 서울신탁은행으로 하여금 자금관리를 맡기는 등 눈코 뜰 새 없는 1주일이었을 겁니다.
- 범양 박회장 자살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관련 공무원 수사설이 나돌자 해운항만청직원들은 불똥이 튈까 전전긍긍하는 분위기였습니다.
84년의 l차 해운합리화 조치 후에도 한 회사의 내분으로 당시 주무국장을 비롯, 많은 직원이 징계처분을 받아 해임되거나 문책인사를 당했거든요.
이번 사건과 관련, 공무원내사설까지 나오자 한 간부는 『1, 2차에 걸쳐 정부로서는 획기적인 지원을 했지만 1백11개 회사가 20개로 줄어들고, 이번 경우만도 9백여억원의 개인자산을 내놓도록 했으니 이런 일이 있고 보면 업계에서조차 좋은 소리가 나오겠느냐』면서도 『지나고 보면 별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애써 태연하려 하더군요.
- 범양은 은행관리에 들어가면서 현 과도체제가 껍데기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직원들이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은 제3자 인수에 관한 것이라더군요. 그럴 경우 3∼4차례 통폐합을 거친 그야말로 「팔자 센 샐러리맨」들이 속출한다는 것이죠.
- 이번 사건에 K고 출신들이 많다는 것도 얘깃거리죠. 사건을 일으킨 범양의 한사장과 허전무가 그렇고, 수습에 나선 정인용 장관·정연세 항만청장·구기환 서울신탁은행장 등이 동문이지요.
- 이번사건은 기업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크게 노출시킨 또 하나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산업합리화 지정과 그에 따른 구제금융 등 정책적 혜택을 입은 기업이 경영정상화는 외면하고 오히려 이전투구식 경영권다툼이나 벌이고 거액의 외화를 빼돌려 초호화판 생활을 한 점등은 국민들의 비난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 쓰러져가는 회사를 일으키라고 도와줬는데 그 돈으로 고급승용차를 타고 밍크코트나 사 입었으니 욕을 먹지요. 「기업은 망해도 기업인은 산다」는 얘기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도록 기업윤리쇄신의 일대계기가 되어야할 것입니다.
- 한사장은 내연의 처 김희평씨(39)와의 동거사실이 알려져 「약점이 잡히는 것이 두운 나머지 김씨를 제3의 남자와 위장결혼시키는 등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한사장은 김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까지 낳은 뒤인 75년12월 당시 미국유학중인 한모씨(48)와 서류상으로 결혼시켜 자신에 관해 사내에 떠돌던 소문을 사실무근인 것처럼 증명하러 했다는 것입니다.
한사장과 김씨는 76년 이후 모두 40차례에 걸쳐 해외나들이를 하면서 애정행각을 벌였으며 도피시킨 재산은 나들이 때마다 관리하거나 미국에 이민간 형제들에게 맡겨 관리해온 것으로 드러났어요.
- 사건을 넘겨 받게된 검찰은 사건규모도 규모지만 아무래도 언론보도쪽에 더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습니다.
특히 외화도피 등 사건방향이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책임이 불가피한 방향으로 진전돼 나아가자 결국은 검찰이 뒷마무리를 해야된다고 이미 초기단계부터 감을 감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나 검찰은 내키지 않는 기색들이더군요.
- 어차피 「잘해야 본전」이라는 것이 이 사건을 보는 검찰의 시각 같아요.
홀딱 뒤집어 놓자니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적잖겠고, 그렇다고 설렁설렁 하자니 여론의 반향 또한 만만치 않을 거라는 인식 때문이지요.
실제로 한사장 등에 대한 호화생활상이 보도되면서 검찰에는 『왜 이런 자를 국세청에 맡겨두느냐』는 항의전화가 여러 차례 걸려왔다는 얘기입니다.
- 사건수사를 맡을 것으로 알려진 한 검찰관계자는 『과거 이-장사건때 검찰이 얼마나 언론에 시달렸느냐』면서 우리 언론도 『남비 끓듯 하는 속성은 이제 벗어버릴 때가 됐다』며 심적인 부담을 가중시키는 언론에 일침을 가하기도 하더군요.
하여튼 다음주쯤에는 불가불 검찰이 끝내기를 하게될 것 같습니다.
결과야 미리 장담할수 없지만 국세청이 밝힌 것 이상의 엄청난 「새것」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검찰관계자들도 입버릇처럼 용두사미라고 나중에 시비걸지 말라고 농반진반으로 한계를 암시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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