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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부장의 뉴스분석] 권력과 재벌 ‘잘못된 만남’…28년 전 데자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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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차는 날아갈 듯 냈고, 2차는 이치에 맞아서, 3차는 편하게 살려고 냈다.”

1988년 5공 일해재단 청문회
정주영 “편하게 살려고 돈 내”
2016년 오늘 총수 9명 청문회
청와대 강요로 돈 냈지만
촛불 민심은 “재벌도 공범”

1988년 12월 14일 ‘5공화국 비리 조사 국회 특별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정주영(1915~2001) 당시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답변이다. 권력 앞에 약한 대기업이 일해재단에 거액의 돈을 ‘출연’한 사연은 그랬다.

28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한민국의 국내총생산(GDP)은 88년 2023억 달러에서 2015년 1조4102억 달러로 7배 늘었다. GDP 기준만으로 세계 11위다.

덩치는 커졌지만 한국 경제사에 2016년 12월 6일은 다시 치욕의 날이다. 시곗바늘은 놀랍도록 정확하게 뒤로 되돌려졌다. 삼성·현대차· LG·SK 등 내로라하는 9대 기업 회장들이 국회의 ‘최순실 국정 농단 국정조사 청문회’에 선다. 악역이 전두환 대통령에서 박근혜 대통령으로 바뀌었지만 사유는 같다. ‘박 대통령이 최순실, 안종범과 공모해 강요한 행위’(박 대통령 탄핵소추안의 문구)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은 9명의 대기업 총수들에게 미르(486억원)·K스포츠재단(288억원)에 모두 774억원을 낸 이유를 따질 예정이다.

28년 전과 다른 것도 있다. 그동안 기업 총수들이 개별적으로 국회 국정조사에 나간 일은 있지만 6일처럼 한꺼번에 9명이 증인으로 출석하는 건 또 처음이다.

이들은 뭐라고 답할까. 정 명예회장이 그랬듯 “날아갈 듯, 편하게 살려고 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까.

6일 ‘최순실 국정 농단’ 국정조사특별위원회에 출석하는 대기업 총수 좌석 배치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등 8개 그룹 총수 외에 허창수 GS 회장은 전경련 회장 자격으로 출석한다. [사진 오종택 기자]

6일 ‘최순실 국정 농단’ 국정조사특별위원회에 출석하는 대기업 총수 좌석 배치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등 8개 그룹 총수 외에 허창수 GS 회장은 전경련 회장 자격으로 출석한다. [사진 오종택 기자]

증언대에 서게 될 기업들은 억울해한다. 익명을 요청한 한 대기업 임원은 5일 “대통령과의 독대 후 안종범 경제수석이 (우리 몫이라며) 광고회사 청탁이 담긴 서류봉투를 건넸다. 그걸 모른 척할 강심장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 세무조사·검찰권을 가진 대통령이 일대일로 만나 “문화와 스포츠 발전에 애써 달라”고 하는데 뿌리칠 수 있겠느냐라고도 항변했다.

하지만 대기업을 힘없는 약자로만 보는 시선은 없다. 무엇보다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 재단 출연금을 종용받은 상당수 기업은 승계 과정, 사업 면허 취득과정 등에서 허점을 보였다. 투명하지 못한 의사 결정 구조, 소수 지분을 가진 총수들의 제왕적 기업 경영 등은 권력이 노리는 약한 고리다. 그걸 박근혜 정부는 물고 늘어졌다. “편하게 살려고 돈을 낸” 건 이처럼 권력과 타협하려는 의도가 내포돼 있다. 기업 스스로 권력에 다가섰던 건 아닌가 의심이 드는 대목도 있다. 잘못된 만남인 셈이다. 특히 증인석 맨 앞줄 중앙에 앉을 삼성 이재용 부회장에겐 가장 많은 질문이 쏟아질 것을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예고했다.

의원들, 호통·망신주기 청문회 말아야

삼성전자 본사 등이 입주한 삼성 서초사옥은 최근 3주일 연속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았다. 삼성엔 재단 출연 외에도 ▶국민연금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건에 찬성 표를 던진 데 외압이 있었는지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를 직접 지원한 의도는 무엇인지 ▶언제부터 최순실씨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는지 등의 질문이 퍼부어질 예정이다.

6일은 권력과 기업이 악어와 악어새로 공생하는 틀을 깨부술 출발점이 될 수 있을까. 김범준 가톨릭대 경영학부 교수는 “국민 앞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해명 기회인 만큼 총수들은 밝힐 건 밝히고 사과할 건 사과해야 한다. 이번 청문회가 권력과 자본의 관계를 새롭게 정리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돌아보면 대기업 총수들을 청문회로까지 불러낸 건 지난 한 달여간 광장에 모인 촛불이다. 속고 속은 국민들은 특별검사, 국정조사, 대통령 탄핵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촛불시위 현장에 등장한 ‘재벌도 공범이다’는 문구는 대기업들엔 서늘한 경고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치개혁과 재벌개혁은 이제 동전의 양면”이라는 주장이 공감을 얻는다. 정치와 경제를 후진(後進)에서 건져내기 위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국정조사 특위에선 질문자와 증인으로 갈리지만 위원들은 피의자를 다루는 검찰이 아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청문회에 출석하는 기업들은 대부분 글로벌 기업”이라며 “국회의원들도 호통치기와 훈계조의 망신주기 청문회는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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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9명의 대기업 총수들에게 88년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던져진 질문이 다시 던져진다. 또다시 “편하게 살려고 낸다”는 답변을 원하는 국민은 없다. “잘못됐다. 고치겠다. 경제 한파를 헤쳐나가는 데만 진력하겠다”는 고해성사와 각오가 필요한 시점이다. 28년 전의 데자뷔를 보기엔 우리의 정치·경제 상황이 너무도 엄중하다.

글=김준현 기자 takeital@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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