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안이한 인생관이 주범|「범양」박회장 사건을 계기로 본 심리적 배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범양상선 박건석 회장의 투신자살사건은 그의 죽음에 뒤따르는 현실적인 여러 가지 문제를 떠나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까지 된 심리적 배경과 고층빌딩 투신을 자살방법으로 택한 심리적 측면에 대한 몇 가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심리학자와 정신과 전문의 등 전문가들은 일단 박회장의 자살동기를 『죽음이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단순하고 안이한 인생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박회장의 경우는 그가 부유한 가정에서 어려움을 모르고 성장해 난관에 부닥쳤을 때 그것을 극복하고 일어서려는 의지와 결단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쉽사리 죽음을 선택했으리라는 것이다. 자수성가한 사람일수록, 어려운 일을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현실에 대응하는 저항력은 강해지게 마련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사소한 일에도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게 되며 그것이 가중되면 「막다른 골목」에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J교수(서울대·정신분석학)는 『박회장 개인만의 특별한 사정이 있겠지만 그런 상황에서 모두 죽음을 택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정신의학이 접근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J교수는 그중 한가지 사실로 그의 나이가 59살인 점을 들었다.
60살에 가까운 50대 후반은 이른바 「남성 갱년기」로 인생의 허무와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층빌딩에서의 투신을 자살방법으로 택한 까닭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재미있는 견해를 제시한다. 반드시 자살하지 않으면 안될 심각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심신에 피로를 느낄 때, 입시공부나 사업이 벽에 부닥쳤을 때, 혹은 일을 마친 후 마음의 공백을 느낄 때 인간은 창문을 열고 뛰어넘고 싶어하는 충동을 갖는다고 한다.
결국 투신은 가장 결연한 방법의 하나로 죽음의 결의가 강할 때 선택된다. 반면 약물이나 가스자살 등은 미수에 그치기가 쉬운데 아직 생에의 미련이 남아있을 때 선택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오금이 저려오는 본능적 공포를 느낀다. 극단의 경우 고소공포증까지 유발한다.
그러나 고층빌딩·고층아파트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고소공포에 대해 무감각해진다. 높은 곳에 익숙해진다.
이 「떠오름」과 「떨어짐」의 엑스터시는 고층빌딩에 사는 현대인에게 특유한 도발성을 유발시킨다.
전문가들은 현대인에게 「죽음」과 「떨어짐」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 오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또 고층빌딩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엔 낙하를 유혹하는 듯한 자력이 작용하고 있다. 고층빌딩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공포와 황홀의 소용돌이 속에서 낙하의 충동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이근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