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과 음해의 풍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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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 기업인의 자살이 우리 사회에 적잖은 충격을 주고 있다.
그 충격은 단순히 한 기업인의 불행한 최후에 대한 호기심과 연민을 넘어서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가 이처럼 살벌하고 황량한 지경에 이르고 있는가 하는 우려로 번지고 있다.
그 기업인의 자살 원인이 결국 그의 주변인물들의 투서와 음해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우리 사회인간관계의 파탄상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투서와 음해, 모략, 배신과 같은 폐습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사회를 병들게하고 있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인간관계의 기본적 윤리를 부정하는 이같은 패륜에 대해 우리는 한층 심각하게 경계, 규탄하게 된다.
죽은 기업인은 자신이 발탁, 기용한 후배, 부하의 배신에 참담한 고통을 호소하면서 유서에서까지 『인간이 되시오. 천벌받습니다』고 사무친 원한을 토로하고 있다.
사실 인생의 아픔중에 믿고 아끼던 사람으로부터 배반 당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상사의 비밀을 가장 잘 알고 많이 알수 있는 사람이 그것을 기회로 상사를 협박하며 심지어 고발해서 궁지로 모는 행위는 도덕적으로도 용서할수 없다.
예부터 성현들은 믿음과 사랑의 인간관계를 가장 중시하면서 도덕적 행동을 강조하곤 했으며 그것을 지키지 못할때 최소한 명철보신하는 지혜를 기르라고 가르치고있다.
이를 테면 공자는 『말에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언필신 항필과)고 하면서 이것을 최소한의 군자가 갖출바 덕목으로 삼고 있다. 그에겐 신뢰를 깨는 배신이란 도대체가 생각할 수도 없다.
인간의 사회는 근본적으로 기계의 세계는 아니다. 인간의 사회는 존귀한 생명애와 인정으로 엮어가는 조직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인간성을 존중하구 인간가치를 북돋우는 도덕과 문화가 형성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의 가치는 다만 경제적으로 풍부해지고 잘 먹고, 잘 놀수 있는 사회가 된다고해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성을 지키고 인간으로서의 이를 다하며 살수 있을때 인간의 가치는 확보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지금 온통 더 많은 달러를 벌어 들이기위해 제 정신을 잃고 일하며 다투는 사이에 정말 귀중한 우리의 인간성을 잃고 나면 우리는 아무 가치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좀더 출세하고 좀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동료와 상사를 밀고하고 음해하는 인간 파탄마저 불사하는 지경이 되었다면 우리 사회는 정말 두려운 사회가 된 것이다.
그걸 단지 몇몇 간악하고 비열하며, 또 몰염치하고 냉혹한 사람들의 행동으로 돌리기도 어려운 세태가 되었다.
기업의 내부만이 아니고 정치의 무대에서도 학교나 시장에서도 이익과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수적인 음해작태가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는 타락한 세상이 되었다.
우리 사회의 도덕과 정의를 위해서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용서될수도 용인될수도 없다. 이젠 우리 사회도 좀 어른이 되어야 한다.
배신과 음해의 풍토를 씻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밝히는 첩경일뿐 아니라 우리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첫 걸음이라는 인식을 이제 우리들 가슴에 다시 새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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