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민주화법’ 밀어붙이기…끙끙 앓는 재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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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에 주요 기업들이 대거 연루되면서 야권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이번에야말로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어서다.

대주주 영향 축소 상법개정안
오너 지배 제한 공정거래법 등
야당 측, 논의 없이 통과 기세

더불어민주당은 지난달 22일 상임위 간사단회의를 열고 이번 정기국회에서 우선 처리할 법안 23개를 확정했는데 여기에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 8개가 포함됐다. 이번 정기국회는 오는 9일까지 열린다.

이를 보는 기업들의 속내는 복잡하다. 재계 관계자는 “경영 현실을 감안하면 달갑지 않은 법안들이 상당수 있는 건 사실이나 사회 분위기상 드러내 놓고 말을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이 부담스러워하는 대표적인 법안은 상법 개정안이다. 이 안은 감사위원 분리 선출제, 집중투표제, 다중대표 소송제 등을 담고 있다. 감사위원 분리 선출제는 일반 이사와 감사위원을 따로 선임하는 제도인데 감사위원 선임 때 대주주의 의결권은 3%로 제한된다. 대주주의 영향력이 크게 축소되는 것이다. 반면 투기자본은 법인명 변경 같은 지분 쪼개기(3% 이하)를 통해 의결권 제한 규정을 피할 수 있어 위원 선임에 영향력을 키울 수 있다. 대주주의 의사보다는 투기자본 등에 감사위원 선임이 휘둘릴 수 있다는 얘기다.

집중투표제도 기업에 주는 부담이 적지 않다. 현재는 이사를 뽑을 때 1주당 1표씩 행사할 수 있으나 집중투표제가 도입되면 뽑는 이사의 수만큼 주당 표를 배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사를 3명 뽑기로 하면 1주당 3표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대주주보다 외국인 지분율이 더 높은 기업의 경우 외국인 주주들이 특정 후보에게 표를 몰아준다면 이사진 구성에 상당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한 나라는 러시아·멕시코·칠레 등 3개국뿐”이라며 “미국·일본·이탈리아 등 대부분의 나라가 제도는 존재하되 채택은 기업 임의에 맡기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명현(한국기업지배구조연구원장)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도입에 앞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지, 21세기 한국 기업에 꼭 필요한지 진지한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제윤경 민주당 의원 등이 제출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오너 일가가 지배력을 높이는 데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 법안에는 자사주 의결권을 제한하는 내용이 담겼다. 대주주의 지분율이 낮은 국내 기업들은 그간 자사주를 지배구조 강화 수단으로 삼아왔다. 기업을 인적 분할해 지주사와 사업사로 나눈 뒤 자사주를 맞교환하면 지주사는 사업회사에 대해 자사주 수만큼 의결권을 갖게 된다. 제 의원이 제출한 법안은 기업 분할 때 자사주를 소각하도록 의무화해 이런 식의 의결권 확보를 봉쇄했다. 재계에서는 이 법안이 통과되면 삼성전자·SK텔레콤 등의 지배구조 개편에 제동이 걸릴 것으로 전망한다.

삼성생명은 보험업법 개정안 처리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보험업법은 보험사가 자신이 속한 대기업집단 내 다른 계열사 유가증권을 자기 자산의 3% 이내에서만 보유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3%를 따질 때 계열사 유가증권의 ‘취득가격’을 기준으로 계산해 왔다. 그러나 개정안은 시중 가격으로 계산하도록 했다.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 7.3%의 취득원가는 5700억원이지만 2016년 11월 말 현재 시가평가액은 약 24조원이나 된다. 법안이 통과되면 삼성생명은 자기자본의 3%가 넘는 삼성전자 주식 약 15조원어치를 매각해야 한다. 금액이 워낙 커 이 지분을 매각하려 해도 인수해 줄 계열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전문가들은 경제민주화 법안 처리를 두고 정치권과 기업이 모두 전향적으로 임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신석훈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장은 “감사위원을 이사들과 분리해 선출하면서 지주사 지분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하면 투기자본이 이사회 과반을 장악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이 경우 SK·LG·GS 등 지주사 체제 그룹의 경우 경영권을 위협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정치권이 진지한 고민 없이 분위기에 휩쓸려 제도를 만드는 것도 경영에 대한 잘못된 정치개입”이라고 주장했다. 조명현 교수는 “외국계 헤지펀드들이 들어와 설치는 기업은 경영이 투명하지 않거나 지배구조가 취약한 기업”이라며 “대기업들도 경제민주화 법안을 무조건 반대만 할 게 아니라 전자투표제처럼 소액주주들의 참여를 확대하면서 경영에 큰 지장이 없는 제도는 열린 마음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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