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계에 얽힌 「로킷기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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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파리=홍계호특파원】프랑스와 소련간에 또다시 외교관 추방전으로 비화된 소련의 간첩사건은 미인계로 인한 사랑의 맹목과 배신, 최신과학정보, 그리고 조국에 대한 배반 등이 점철된 현대첩보 전쟁의 전형으로 시작됐다.
이번 추방극에는 루마니아여인「안토네타·마놀」(41) 이 먼저 주역으로 등장한다.
소련군사정보기구 (GRU)의 지령을 받은 이 여인은 프랑스에 잠입, 프랑스국립 경제통계연구소에서 비서로 일한다. 그녀는 이곳에서 프랑스의 엘리트 엔지니어 교육기관인 에콜 폴리테크니크출신의 기술자「괴에르·베르디에」(36)에 접근, 포섭에 성공하며 유럽각국이 협력 하고 있는 우주개발계획의 아리안 로키트에 관한 정보를 빼내다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사람에 눈이 먼 그녀는 본연의 임무인 첩보활동올 망각해버리고 만다.
두사람의 활약이 미지근해지자 소련은「마놀」의 대역으로 「루드밀라·바리긴」양(31)을 보낸다. 아름다운 용모와 독일유학에서 얻은 지성미까지 갖춘「바리긴」은 10년 위의「마놀」을 따돌리고「베르디에」를 독점, 지난해 7월 결혼식을 올린다. 연적에게 사람을 빼앗긴「마놀」은 분노를 삭이지 못하다가 자신이 저지른 간첩행위의 전모를 익명의 편지에 담아 「시라크」수상 집무실로 보낸다.
결국 사람의 종말과 함께 소련의 첩보망도 무너진다는 이 스토리는 프랑스 수사기관이 밝혀낸 「아리안 로키트 간첩사건」의 실상이다.
프랑스 정부는 2일 이 사건과 관련된 파리주재 소련외교관 3명에 대해 추방령을 내리고 앞서의 여인2명을 포함한 7명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소련대사관무관보좌역「발레리·코노레프」소령을 우두머리로 한 이들 조직은 프랑스 우주항공 기술의 최첨단이라 할 수 있는 아리안 로키트의 비밀을 캐내 이를 GRU에 넘겨온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는 현재 통신위성에 사용하는 아리안 로키트 외에 액화수소·산소를 연료로 하는 보다 발전된 아리안5를 제작중이며 96년에 첫 발사할 예정이다.
소련측은 이외에도 아리안5제작소가 있는 루앙시 인근의 제트엔진 부품공장, 위성통신플랜트 등 프랑스의 첨단 우주항공기술을 빼내러 한 것으로 보도되고있다.
프랑스 언론들은 소련외교관들에 의해 저질러진 스파이행위보다도 여기에 포섭된 최고수준의 인재들이 조국을 배반한 것에 대해 더 큰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다.
프랑스는 83년 47명의 소련외교관을 무더기로 추방한바 있고 86년에도 4명이 추가됐으며 그 배경은 이번 사건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인문계의 그랑제클(프랑스 고위관리는 대부분이 학교 출신)에 맞먹는 최고기능인 양성소 출신의 엘리트들이 간첩사건에 휘말린 것은 유례가 없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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