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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서…|황지우<시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우리에게 미술전시장은 왜 관혼상제적인가? 값비싼 화환들이 즐비하고 방명록이 준비되어 있는 전시장을 한바퀴 돌고 나오면 나에게는 장례식장을 빠져나오는 기분이 든다. 더우기 그날이 오픈하는 날이기라도 하면 그 사교적 법석이란 그립 몇 점 벽에 걸어놓는 일이 그렇게 관혼상제적으로 기념할만한 일인가? 물론 그것은 기념할만하다. 작업실에서의 그 노고를 생각하면 충분히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을 보여주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림에 의해 보여진 것으로서만 가능하다.
내가 가 본 선화랑·샘화랑·관훈미술관·제3미술관·한강미술관 등은 그런 의미에서 보여줄 뿐, 보여진 것이 없었다. 자기 이름을 책임질만한 위치에 있는 중견작가들은 색이나 빛과 같은 회화적 질료 자체가 주는 쾌락에 빠져있거나, 아니면 단순하고 무기질적인 오브제의 동어반복적인 배열에 하염없이 몰두해 있었다.
기성작가들이 정신의 기근에 들어있다면, 다른 한편으로 젊은 화가들은 꼭 그렇게 해야할 내적 필요에 의하지 않고 까닭 없이 큰 것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저것이 어느 시대의, 누구의 그림인가 하는 물음에서 시달렸다기보다도, 저것을 왜 그렸으며, 어쩌자고 그것을 갖다가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기까지 하는가 하는 물음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우리 화가들이, 특히 젊은 화가들이 무슨 「젊은 의식」전이니, 「80년대 기수」전이니 하는 자화자찬에 가까운 타이틀 아래 함부로 작품을 기탁하지 말고, 그 이전에 『왜 이 그림을 이렇게 그려야 했으며, 정말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줄만 한가』하는 자기 점검에 보다 진지하게 매달렸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그리기 전에, 그리고 갖다 들이기 전에 한번 더 의심해 보았으면 한다. 그래서 『아 지금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구나』하고 느낄 수 있게 현기증 나는 개성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주길 나는 바란다.
철거민 지역·장터 등에 이동전시를 시도하고 있는 『가는 패, 열림 전』(그림마당 민·3월26∼30일)은 전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미술의 의사소통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인해 주목할만하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여진 것」이다. 왜냐하면 미술의 소통은 끝에는 그 「보여진」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닭장 망안에 농민의 얼굴이 부조되어 있거나 낡은 빨래만 속에 인물을 부조해 넣은 마문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연작은 소통할만한 「보여진」그 무엇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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