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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는 울고 「아마」는 웃는다|숨가쁜 증시 열풍… 달라진 풍속도|"경험보다 배짱"…오를듯하면 갈아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프로는 울고 아마추어(초심자)는 웃는다.』 요즘처럼 겁없는 「대리증시」를 두고 「한다」하는 전문가들이 내뱉는 푸념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왕년의 대가들은 별 재미를 못보고 있는 마당에도 멋모르고 달려드는 신출나기들은 승승장구하고 있는 증시의 새 풍속도다.
실례를 보자. 지난 1월 중순, 증권사가 고객보호를 위해 익명을 요구하는 K씨(42)는 2억원을 챙겨들고 서초동에 있는 D증권 지점장실을 찾았다. 간단한 절차를 거쳐 구좌를 튼 그는 투자상담을 마다하고 다짜고짜 시세판 앞으로 다가가더니 끝부분에 있는 관리대상종목을 지정, 20개 종목을 살 수 있는대로 사달라는 주문을 냈다.
이에 깜짝 놀란 지점장은 K씨에게 관리대상종목이 무엇인지를 열심히 설명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해달라』며 자신의 요구를 굽히지 않았다.
두달 남짓 지난 3월말현재 K씨의 돈은 5억여원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 새 1백50%의 투자수익을 올린 셈.
K씨는 말죽거리에 있던 땅으로 하루아침에 일어선 이른바 복덕방가의 「사장님」.
이 바닥에서 십수년을 굴러 스스로 전문가임을 자처하던 지점장이 얼마 전 K씨에게 『어떻게 관리종목을 살 생각을 했느냐』고 넌지시 물었을 때 또 한번 놀랐다. 『싸니까 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K씨는 지점장에게 점잖은 충고도 잊지 않았다. 『남자가 배짱이 있어야 한탕하지 언제 한몫 잡겠느냐』고.
몇 차례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뒤로 지점장은 억대 신규고객에게는 투자상담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실토한다.
K증권 영동지점은 「사모님고객들이 많기로 이름나 있다. 「핸드백 부대」로 불리는 이들은 상오 11시쯤이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객장에 들어와 시세판을 둘러보고 과감한 종목전환을 지시(?)한다. 갈아타는 이유는 명쾌하다. 전일시세보다 홋가가 오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며칠째 제자리걸음 또는 약세를 보이다가 다소 오름세를 보이는 종목은 여지없이 이들의 투자 타기트다.
영업실적이고 회사경영사정 따위는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태도다.
『이것저것 다 재고나면 언제 남의 돈 먹겠느냐』는 뱃심이다.
이 지점은 이런 여성고객들의 단순심리를 이용, 최근에는 「올코트프레싱」전법을 즐겨쓰기도 한다. 하루에 3∼4개 종목만을 지정해 몰아치기로 집중매입, 짭짤한 수익을 올려주면서 잦은 갈아타기로 수수료수입도 올리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고있다는 것이다.
주가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서만 치닫는 형상이라고 해서 이처럼 다들 웃는 얼굴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판이고 승자가 있으면 패자도 있게 마련. 종목에 따라서는 작년 말 시세를 찾지 못하는 것도 적지 않다.
여기에 속하는 것들이 이른바 대형우량주들이기 때문에 「풍년거지」도 드러나지는 않지만 상당수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희희낙낙 하는 판에 앉아서 깨지고 있으니 억울하긴 하지만 나서지도 못한다. 이들 풍년거지들의 주종을 이루는 연령층은 60대.
요즘 뜨내기 「신프로」들에 밀려 「구프로」로 불리는 이들은 주로 명동파 노신사들로 많게는 10억∼20억원씩 굴리며 행세해오다 최근 감을 잘못(?) 잡아 손해를 보고있는 것은 물론, 상대적 빈곤감에 허덕이고 있는 셈.
퇴직한 중소기업체회장·사채업자·빌eld주인들이 대부분인 구프로들은 지난 70년대 말∼80년대 초 건설주파동 등 증시의 풍상을 몸으로 경험한 베테랑들이어서 부화뇌동하지 않고 안전위주의 정석플레이로 일관, 고삐풀린 장세가 진정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명동에 2개의 빌딩을 갖고있으면서 10여년째 주식투자를 하고있는 오모씨(67)는 지난 1월대형주인 S사주가 최고가를 기록했을 때(물론 매입당시에는 더 오를 것으로 생각했었지만) 5억원어치를 샀다가 10%이상 빠지는 상황에서 전혀 움직일 기미가 없어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그렇다고 해서 5천만원 이상 손해보고있는 마당에 선뜻 던지고 다른 종목으로 갈아달 수도 없는 처지.
오씨는 『과거 경험으로 미루어 반드시 대형우량주는 들쑥날쑥하는 잡주와는 달리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갖고 내년 이맘때까지 S사주를 갖고있겠다고 프로근성을 보이고 있다.
그는 요즘 부실기업주들이 겁없이 오르는데 편승, 달려드는 초심자들이 머지 않아 큰 코를 다치고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있다.
그렇다고 해서 명동파들이 오씨의 경우처럼 모두 신사적인 것은 아니다.
어차피 주식투자란 것이 투기심이 곁들인다는 점에서 출발하다보니 개중에는 울화가 치밀어 현실을 이겨내지 못하는 울분파도 있다.
지난 2월 재무부에는 『증시를 이따위로 내버려 둘거냐』는 반협박조의 투서가 잇달았는데 안정성위주의 대형주에 투자한 구프로들이 담합, 항의(?)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증시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경우 자신들의 판단이 어긋날 리가 없는데 종잡을 수 없게 판이 돌아가 상대적으로 손해가 커지자 이를 두고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증권회사직원들의 풀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최근의 장은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격」인데 굴러들어 온 돌이 워낙 땅투기나 아파트투기로 군살이 박힌 뱃심좋은 굵은 돌들이어서 박힌 돌이 판판이 깨지는 형세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돈을 수월히 벌어본 경험이 있어 돈굴리는데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는 데다 투기성이 강해 여차하면 잃어도 그만이라는 두둑한 배짱을 마음 약한 구프로들이 당할 재간이 없다는 얘기다.
이들 신흥졸부들이 주로 강남영동에 몰려있는 판이다 보니 강북에 있던 증권사 점포들도 대거 강남으로 이전해 가는 추세다.
증권거래소가 명동에 버티고 있을 때 명동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월스트리트였지만 이젠 껍데기뿐인 금융의 중심가로 격하된 느낌이다.
그 단적인 예로 제3한강교를 지나 강남구 신사동∼강남전철역 사이에는 무려 17개의 증권사 점포들이 늘어서 있다.
25개 증권사중 70%가 이곳에 지점망을 설치해 놓고 있는 것이다.
증시활황으로 주식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는 바람에 이제 주식투자는 돈 많은 거부나 큰손들만의 머니게임만은 아니다.
전국2백50여개 증권사 점포마다 매일 근로자증권저축가입자를 포함, 평균 10여개씩 새로운 구좌가 개설되는 것으로 미루어 샐러리맨층에서 그동안 모아두었던 수백만원씩을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분위기다. 그만큼 주식투자층의 연령도 연소화되고 있다.
다만 소액투자자들은 남들이 뭉칫돈을 투자, 떼돈을 벌고있는데 현혹돼 「친구따라 강남 가다」가는 자칫 막차를 탈 경우 은행에 가만히 넣어두는 것만큼의 이자는 물론 원금마저 날릴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춘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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