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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 50% 전설의 드라마 뮤지컬로 부활해 오늘을 노래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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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7호 22면

1994년 한석규·최민식 주연으로 50%대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 ‘서울의 달’이 뮤지컬로 부활한다. 고도성장기 달동네 아웃사이더들의 고달픈 서울살이로 풀어낸 인간의 욕망과 성공에 대한 담담한 질문에 울고 웃던 기억이 생생하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디지털 혁명으로 우리의 일상은 급변했지만 그 삶의 내면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서울시뮤지컬단의 신작 ‘서울의 달’(12월 10~2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은 90년대 유행가를 틀어대는 복고 취향의 무대가 아니다. 2016년 서울,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들의 욕망이 들끓는 도시 한구석이 다시 기지개를 켠다. 지방에서 상경해 오직 신분상승을 향해 질주하는 홍식과 그런 친구를 안타깝게 지켜보며 곁을 맴도는 춘섭은 요즘 눈으로 보기에 영 쿨하지 못한 20세기적 캐릭터가 아닐까. 배우 이필모(42)와 박성훈(41)은 여기에 절반만 동의했다. 누구보다 뜨겁게 삶을 사랑하는 이런 남자들이 21세기에도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명함을 건네자 예쁘게 깐 귤을 내밀었다. “손은 깨끗이 씻었습니다”라고 예의바르게 말했지만,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부스스한 차림새로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춘섭, 아니 박성훈은 머리를 긁으며 종이에 뭔가 끼적이고 있었던 것이다. 미리 전한 질문지에 빨간 펜으로 모범답안을 채워넣으며 “문제가 너무 어렵다”고 한숨짓는다. 반면 약속시간보다 10분 늦게 나타난 이필모는 질문지 따윈 처음 본다는 표정으로 “형만큼만 대답하라”며 씩 웃는다. 우직한 춘섭과 뺀질이 홍식에 일찌감치 빙의된 모양새다. 하지만 94년 당시 갓스물 청년이었던 두 사람은 ‘질풍노도’의 청춘을 보낸 탓에 TV는 잘 보지 않았고, 덕분에 “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홍식과 춘섭이 탄생할 것”이라 주장했다.


지금 왜 ‘서울의 달’인가요.


이: 아날로그 시대였던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죠. 처음엔 저도 의문이었어요. 지방에 가도 새 아파트 천지인데 달동네에서 망치 들고 지붕 고치는 걸 젊은 세대가 공감할 수 있을까. 하지만 타워팰리스 뒤쪽엔 지금도 판자촌이 있으니까요. 그 감성을 젊은 세대도 공감하게 만들어야 하는 게 큰 일이죠. 노래와 비주얼 위주로 뮤지컬을 보는 이들에게 그 안의 내면을 보여주는 게 숙제랄까요.


박: 인정에 목마른 시대잖아요. 어렸을 때 친구와의 우정을 떠올리고 향수에 젖게 하는 면도 있어요. 요즘 중년 세대가 즐길만한 게 별로 없는데, 이런 작품 보면서 따뜻한 온기를 가져갈 수 있지 않을까요.


뮤지컬 ‘서울의 달’은 전남 장흥에서 상경한 홍식과 춘섭의 사랑과 야망이라는 드라마의 기본 골격을 유지하지만 원작을 몰라도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각색됐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2016년을 배경으로 82부작 드라마의 엑기스만 뽑아 압축했다. 무대 진행도 지루할 틈 없이 빠르다. 각자도생·승자독식·유체이탈·책임회피 같은 이 시대의 키워드들이 그대로 등장한다. 착한 여자 영숙보다 센 여자 서현의 비중이 커졌고, 카바레 제비족이었던 홍식도 호스트바 에이스로 거듭났다.


최근 ‘호빠’ 출신이 집중 조명을 받았는데, 캐릭터 접근은 잘 되고 있나요.

이: 호빠 연기를 해본 적은 없고, 그들이 일하는 곳에 몇 번 가본 적은 있어요. 배우는 어지간한 경험을 해봐야 한다는 생각인데, 여자들을 따라 가볼 기회가 있었죠.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이니 너무 뻔해서 금방 파악이 끝나더군요. 정말 ‘에이스’가 되려면 많은 걸 갖고 있어야겠더군요. 남자다우면서도 부드럽고, 그렇게 양극을 오갈 수 있어야 차도 얻고 집도 얻겠죠(웃음).


박: 저는 먼저 장흥에 내려가 봤어요. 저도 충남 예산에서 올라온 촌놈이지만 춘섭을 좀더 이해하고 싶어서요. 사투리 들으려고 노인정에 귤도 사들고 가고, 바닷가 쪽이 사투리가 세니까 낚시하면서 귀 기울여 보기도 했고요. 장흥이 굉장히 조용한 동네라 정이 많이 가더군요. 돌아오는데 꼭 춘섭이 돼서 올라오는 느낌이었어요. 촌스럽게 시골에서 가장 비싼 양복을 해 입고 바리바리 보따리 싸들고 올라오는, 그런 기분이 들더라고요.


캐릭터 접근 방식도 제각각인 두 사람이지만 드라마 속 한석규·최민식의 이미지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같았다. 이들은 저 20세기 인물들을 어떻게 살려낼까. “저를 보며 한석규씨를 떠올리는 분은 안 계실걸요. 요즘엔 뭐든 쉽게 포기하는 ‘9포 세대’인데, 제가 생각하는 홍식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인 거죠. 100m 달리기를 하다가 102m 지점엔 절벽인데도 가속도 그대로 달려가 떨어지는, 외롭고 허망한 인물이에요. 죽기 전 마지막 대사가 ‘보이즈 비 앰비셔스’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게 홍식을 단적으로 설명해주죠. 그 끝은 인간적이고 아름답게 그려졌으면 해요.”(이)


“저도 제 안의 정서를 담으려고요. 춘섭은 홍식의 유일한 친구였고, 늘 이용당하면서도 받아주며 자라온 거잖아요. 하나밖에 없는 친구로 믿고 옆에서 지켜보는 역할인데, 요즘 시대에 없는 사람일 수 있죠. 하지만 전 반드시 있다고 믿고 있고, 저 또한 그런 친구이고 싶어요. 비웃음당하더라도 꼭 필요한 사람이니까. ‘내일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지붕을 고치겠다’는 게 묵묵히 자기일 하는 춘섭이거든요.”(박)

이필모 1974년생. 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 ‘내마음 반짝반짝’ 등으로 브라운관에서 친숙한 얼굴이지만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 ‘남한산성’ 등 무대에도 꾸준히 서고 있는 전천후 배우다. 올해 MBC드라마 ‘가화만사성’에서 차가운 워커홀릭이지만 불치병에 걸린 유현기 역으로 큰 사랑을 받고 ‘2016 아시아태평양 스타 어워즈’를 수상했다. 박성훈 1975년생. 2002년 서울시뮤지컬단에 입단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마법에 걸린 일곱 난쟁이’ ‘아가씨와 건달들’ 등 주요작품을 이끌며 안정된 연기력을 인정받고 있는 대표적인 연기파 배우다. 2009년에는 일본 긴가토 극단과의 문화예술교류공연으로 기획된 뮤지컬 ‘침묵의 소리’로 일본 무대에서 큰 호평을 받기도 했다.

[“한석규·최민식과는 다른 매력 보여줄 터”]


올해 드라마 ‘가화만사성’에서 인상적인 연기로 ‘2016 아시아태평양 스타 어워즈’를 수상하는 등 맹활약했던 이필모는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대전으로 내려가 연극 ‘오셀로’ 무대에 섰고 연극이 끝나자 이번엔 뮤지컬로 옮겨 왔다.


“원래 무대 출신이라 연극이건 뮤지컬이건 무대에 대한 로망이 늘 있죠. 그런데 미디어 쪽과 동시에는 못해요. 그런 사람도 있지만 전 그렇게 못하고 하나에 집중해야 하니 드문드문하게 되는 거죠. 저희 집은 하나라도 잘해야 한다는 게 신조라서요. 집에 가면 반찬도 딱 한 가지예요(일동 박장대소).”(이)


그의 작품 선택 기준은 ‘배우로서 아직 해보지 않은 캐릭터를 해봄직한가’다. 무대냐 매체냐는 나중 문제란 것이다. “‘오셀로’는 400년 전에 대단한 달필인 분이 쓴 이야기인데, 흑인 장군에게 어떻게 공감하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배우로서의 궁금증이 있었어요. ‘서울의 달’은 그보다는 훨씬 더 와닿는 우리 이야기인데, 왜 노란색을 보면 왠지 따뜻한 기운을 느끼잖아요. 연말엔 공연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끝나고 나면 온기가 느껴지게, 거기 한 축을 맡아 봐야겠다 싶은 거죠. 근데 시국이 참···(웃음).”(이)


‘가화만사성’에서의 연기에 반한 김덕남 서울시뮤지컬단장의 섭외로 출연하게 됐지만, 알고 보니 연출이 초등학교와 대학 동기인 창작뮤지컬 ‘셜록홈즈’의 노우성이었다고. 30년 지기의 첫 동반 무대인 셈이다. “각자 살기 힘들고 바빠서 자주 보진 못했지만, 이쪽에서 열심히 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꼭 한번 같이 해보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가 된 거죠. 그 친구가 감각적이고 유쾌하게 작업하는 스타일이라 즐겁게 만들고 있어요.”(이)


한편 박성훈은 ‘균’ ‘밥퍼’ ‘서울1983’ 등 수많은 작품에서 카멜레온 같은 연기 변신을 보여주고 있는 서울시뮤지컬단의 간판스타다. 그런데 재밌는 건 객원인 이필모가 전문 뮤지컬 배우 박성훈에게 이런저런 훈수를 둔다는 것. 인터뷰 코치는 물론, 그 와중에 세심한 연기 지도까지 자처했다. 박성훈도 “(답변을)그렇게 고쳐달라” “그렇게 해야겠다”며 넉살좋게 받아넘겼다. 이런 식이다. “드라마적으로 춘섭에게 제일 중요한 건 영숙을 향한 짝사랑이야. (질퍽한 눈빛을 발산하며) 이런 걸 좀 해 줘야 돼.”(이) “대본에는 그게 잘 안 나와서요.”(박) “네가 적극적으로 어필해야지.”(이) “오늘 가서 바로 연출한테 얘기해야겠어요.”(박)


박성훈은 드라마의 시그니처이기도 한 홍식이 팬티 바람으로 도망가는 장면을 “가장 기대되는 장면”으로 꼽았다. 반면 이필모는 “비주얼적으로 최대한 거슬리지 않게 하겠다”며 몸을 사렸다. “작업 중인 유부녀 남편이 덩치들을 데려와 현장을 덮치거든요. 베란다 에어컨 붙어있는 창문으로 몸을 던져야 하죠. 매우 긴박한 리얼리티를 살려야 되는데 뛰면서 또 ‘사람 살려~’ 이런 노래까지 불러야 되네요. 뭐 잘 되겠죠.”(이)

[“춘섭처럼 우직하게 배우의 길 갈 것”]


‘서울의 달’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또 있다. ‘셜록홈즈’에서 노 연출과 콤비를 이뤘던 최종윤 작곡, 열정적인 지휘로 배우 못잖은 인기를 끌고 있는 김성수 음악감독 등 젊은 창작자들이 뭉쳐 전설의 드라마를 야심차게 재해석하는 시도기 때문이다. 이들은 음악의 남다른 퀄리티를 “작곡가에게 돈을 많이 드려야 한다”는 말로 대신했다.


“긴박한 드라마가 노래로 자연스레 연결되는 게 매력이에요. 쉽진 않아요. 기본 박자가 어려운데 그 안에 정서까지 넣어야 되니까. 관객분들은 상당히 재밌을 겁니다. 대사로 풀었다면 무거울 심각한 얘기를 음악으로 코믹하게 틀었거든요.”(박)


뮤지컬 시장이 커지니 서울시뮤지컬단 작품들은 최근 큰 관심을 끌지 못했는데요.


박: 라이선스 작품보다 창작뮤지컬을 하다 보니 외부의 기대는 덜한 것 같아요. 하지만 이런 단체에서는 창작을 꼭 해야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한국적 색깔도 표현하고 외국 뮤지컬과 경쟁할 수도 있겠죠.


이: 배우로서 꼭 공연해보고 싶었던 곳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이었고, 거기선 꼭 창작물을 하고 싶었어요. 우리 관객이 라이선스 뮤지컬에 현혹돼 있고 그게 장사도 잘 되지만, 배우로선 좀 다른 의미를 찾게 되거든요. 예산도 적고 비주얼이 완벽하게 나오진 않는다 해도, 더 점수를 주고 싶고 마음도 가는 거죠. 그런 면에선 춘섭처럼 우직하게 배우의 길을 가고 싶어요.


두 분도 춘섭처럼 내일 종말이 온다 해도 지붕을 고칠 건가요.


이: 그렇진 않죠(웃음).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려 가야겠죠. 어머니께도 고생 참 많으셨다 한마디 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정말 사랑했다며 마지막 순간에 손잡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박: 저도 못 고칩니다(웃음). 하지만 춘섭은 뜯어고친다고 하죠. 지금 세상도 안팎으로 시끄럽지만 누군가 자기 일을 묵묵히 하고 있으니까 돌아가는 것 아닌가요. 요즘 젊은 세대는 꿈도 미래도 없다고 지레 포기하는데, 이 작품 보고 ‘나도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배우로서 보람되고 감사할 것 같아요.


이: 춘섭은 고결한 사람이라 그래요. 무슨 일이 닥쳐도 자기 길 가는 게 가장 편안한 사람이죠. 최후의 순간을 맞기 직전에 주인공이 책 읽으러 들어가는 어떤 영화가 생각나네요. 그게 어릴 때는 이해가 안 갔는데, 나이 드니까 알 것도 같아요.


박: 고렇게 바꿔주시죠(웃음).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서울시뮤지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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