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문예지 현상 공모 안 거치고 평론가 평가 받아 문단 데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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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등박문이 하르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저격을 피했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전개 됐을까. 그가 만약 강경 군부 세력을 꺾고 태평양 전쟁의 발발을 막았다면 1987년 한반도는 어떤 모습을 하고있을까.
이른바 가상의 역사 (대체 역사)를 바탕으로 한 장편 소설 『비명을 찾아서 ‥ 경성, 쇼와 62년』이 국내 저명 출판사인 문학과 지성사의 편집동인들 (김병익·김규연·김치수·김현·오생근) 에 의해 발굴, 출간돼 큰 화제를 모으고있다.
얼핏 납득이 가지 않는 특이한 제목을 가진 이 작품으로 직접 문단에 데뷔한 작가는 복거일씨 (41).
작품의 형식이나 제목도 파격적이지만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상 및 추천 등으로 좁게 규정 지어진 우리 소설 등단 방식을 벗어나 외국의 일반적인 경우처럼 출판사를 통해 직접 독자와 만난다는 것도 역시 파격적이다.
『정치체제라는 것은 그 자체 뿐만 아니라 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 총체적이며 실질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간에 문학이 정치 또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때「대체 역사」란 장치를 도입한 작품이 씌어지게 마련이지요』
일본 고유의 연대인 「쇼와(쇼화) 62년」은 1987년이므로 결국 제목인 『비명을 찾아서 ‥ 경성, 쇼와 62년』을 구태여 설명하자면 「오늘, 서울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다른 각도에서 봤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이며 종국적으로 남겨져야 할 이야기는 무엇인가」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2백자 원고지 3천장 분량의 이 소설은 우리말과 역사가 일제 지배 77년 동안 송두리째 말살된 상황 속에서 시인이자 한 기업체 과장인 주인공이 자신의 민족과 뿌리를 어렵게 찾아내고, 그 때문에 가해진 핍박을 벗어나기 위해 상해 임시 정부를 찾아 망명을 떠난다는 비교적 간단한 줄거리다.
이러나 암울하고 복잡하게 얽힌 정치 상황을 헤쳐나가려는 한 지식인의 고뇌와 사람이 견고한 문학성을 바탕으로 매우 격동적으로 그러져 있어 독자들에게 강한 지적 충격을 안겨준다는 평이다.
『비용을…』을 집필한 작가 복씨는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15년간 은행·제조 회사·무역 회사 등에서 근무하다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지난 83년 직장을 그만 두었다. 그의 최종 직위는 한국기계 연구소 연구개발 실장.
60년대 대학시절부터 시를 써 온 그는 83년 현대 문학지에 작품을 투고해 초회 추천을 받기도 했으나 그 사실을 4년이나 흐른 지난해 연말에야 알게되었을 정도로 두문불출한채 장편 집필에만 몰두했다는 것. 복씨는 현실에 대한 보편성과 총체성을 획득하기에는 자신의 시 세계가 비능률적이라고 판단, 소설로의 장르 변경이 불가피했다고 말한다. 이 작품을 읽어 본 문학과 지성 편집 동인들은 『「조너던·스위프트」적 기지와 「조지·오웰」적인 음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끝까지 역사에 대한 희망과 정직하게 살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완강함이 커다란 미덕으로 나타난다』며 『오늘의 우리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풍자적 날카로움이 돋보이는 이번 작품은 80년대 우리 소설문학이 거둔 가장 중요한성과로 기록될 것』이라고 평가했다.<양헌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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