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낙제 운전자들의 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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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지난달 9일 하오 8시55분, 서울 반포대교.
2대의 좌석버스가 육중한 차체를 흔들어대며 앞지르기 경쟁을 벌인다. 시속 80km.
승객들이 이리 출렁, 저리 출렁 조리질을 당하는가 싶더니 뒤에 가던 16번 버스가 앞서가던 37번 버스의 옆구리를 「쾅」들이받는다. 순간 16번 버스가 30m높이의 중앙 분리대까지 뛰어넘어 철제 난간을 부수고 10m 아래 고수부지에 곤두박질, 벌렁 누워버렸다. 1명 사망에 28명 중경상. 무모한 앞지르기 경쟁이 빚은 순간 참사.
명절 기분에 들떠있던 1월2일 상오 2시30분, 전북 익산군 오산면 오산리 전주∼군산간 4차선 국도.
눈 내리는 직선 도로를 전북1마2441호 로열 살롱 승용차(운전자 송옥·34)가 쏜살같이 달리고 있었다. 제한속도 7Okm에 시속 1백10km.
순간 차가 기우뚱하더니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길옆 가로수를 들이받고 오른쪽 5m 아래 개울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운전자 등 2명 즉사, 6명 중상.
사고 운전자는 현직 경찰관. 이리에서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정원 5명인 승용차에 술집 아가씨까지 포함, 7명이나 태우고 가다가 사고를 냈다. 경찰관의 신분증이 음주운전을 눈가림한 특권 운전 매너가 불러일으킨 참사.
야만권 운전 문화 속 낙제 운전자들의 천국. 음주·과속·난폭 운전에 정원 초과·앞지르기·끼어 들기가 전국 대도시어디에서나 활개친다. 운전자라면 원초적으로 갖춰야할 기본 매너조차 없다.
일단 핸들을 잡으면 신나게 달리고 본다. 차선도 마음대로, 속도도 제멋대로 「쌩쌩」내달리다 「덜커덕」선다.
마구 끼어 들어 멋대로 가루 막는다.
빨간 신호등 앞에 서서 기다리다 조금만 늦게 출발하면 온갖 험한 욕설이 퍼부어 진다.
제한 속도를 지켜 가면 헤드라이트를 껌벅이며 앞지른다. 법규를 적당히 위반하며 이리저리 비집고 들어가 쌩쌩 내달려야 『거, 운전 한번 시원하게 잘 한다』 라는 소리를 듣는다.
운전이 서툰 주부 오너드라이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영업용 운전자들에게 몹쓸 욕을 먹는다.
특히 덩치 큰 트럭·버스 옆엔 아예 접근을 않는 게 상책. 거치적거리면 확 밀어버릴 듯한 그 기세에 초보 운전자나 주부 운전자는 등골에 땀이 밴다.
그러나 정작 큰 문제는 원칙 없는 단속이다. 위에서 한번 불호령이 떨어지면 법석을 떨지만 집중단속 기간만 지나면 다시 낙제 운전자들의 천국으로 변한다.
조리질 운전에 끼어 들기, 중앙선 침범, 과속·음주 운전 등의 악습은 어느새 많은 운전자들이 큰 잘못으로 느끼지 않는 습벽으로 통한다.
교통 과학 센터가 지난해 전국도시 운전자 7백65명을 표본 추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61·4%가 「법규를 일일이 지킨다면 도저히 차를 운전할 수 없다」는 응답을, 57·3%가 「제한 속도대로 운전하면 다른 운전자가 욕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사고만 없으면 사소한 법규위반은 교통소통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응답도 절반이 넘는 58· 6%.
이러한 운전자의 그릇된 운전 습관은 택시·시외 버스 운전자의 순으로 높게 나타났다.
「횡단보도의 보행인이나 자전거 사이로 지나간 경험이 있다」 는 운전자가 전체의 46·4%, 「직선 도로가 나오면 제한 속도를 넘게 된다」는 게 74·2%,「옆 차선의 차량이 끼어 들어 중앙선을 넘는 경우가 있다」는 응답도 70·6%에 이른다.
잘못된 운전습관은 사고(86년 교통 사고 중 93·2%가 운전자 법규 위반 사고) 를 내고도 이를 다른 이유로 돌리거나 체념해버리는 부정적 태도를 가져온다.
KIST와 도로 교통 안전 협회가 각각 80년·84년에 서울시 운전자 중 일부를 대상으로 조사한 「교통 사고 후 운전 태도 변화」결과를 보면 「얼마간 조심하나 매 한가지」가 80년의 7·3%에서 84년에는 24·1%로 3배가 늘었다. 「별수 없으므로 평소와 마찬가지」라는 응답은 3·3%에서 6·8%로, 「오히려 더 대담해진다」는 반응도 0·4%에서 1·4%로 늘어났다.
자동차 문제 전문가 박내호씨(37·자동차 보험)는 『교통 사고의 93·2%가 운전자 과실이라는 사실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사고를 내고도 어쩔 수 없는 일로 돌리는 운전자의 무상식이야말로 큰 병폐』 라고 진단했다.
그는 『본격적인 자동차 시대를 맞아 안전한 거리를 만들려면 우선 자격 미달의 운전자가 핸들을 잡지 못하게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면허제도·운전자의 재교육·적성검사 강화를 통해 운전자의 자질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재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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