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지혜 담긴 할머니의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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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도통 터무니가 없다. 하지만 당시에는 꼭 그런 줄로만 알았다. 외할머니의 맛난 음식 솜씨는 손끝 어딘가에서 배어나온다고 말이다.

끄트머리가 자글자글 갈라진 정겨운 손가락의 모양새도 그 같은 추측을 뒷받침했다. 엄마가 병약하신 탓에 늘상 할머니의 손끝에 매달려 있는 나를, 할머니는 사과나무에 달린 어린 사과처럼 애지중지 귀애하셨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의 금쪽 같은 손녀딸로 자라났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는 저세상으로 가셨고, 이 세상에는 나 혼자만이 남겨졌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마늘쪽 같은 조선 여인의 모습으로 마음 속에 자리잡고 계신 할머니를 만나뵙곤 한다. 20세기의 문지방을 밟기 직전인 1899년에 태어나신 할머니.

그토록 혹독했다는 왜정시대의 한복판을 동그랗게 걸어오신 할머니. 어쩌면 왜정시대보다 가혹하다고 느껴지기도 하는 시집살이의 한복판을 가만가만 지나오신 할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동생인 손자녀석과의 엿치기 끝에 터뜨리는 기침 같은 웃음소리를 끝내 잃지 않으셨던 우리 할머니.

할머니의 이야기들. 할머니의 할머니의 이야기들. 다시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이야기들…. 이 같은 연속선상에 놓인 수많은 사연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역사다. 아울러 그 같은 '이야기들'을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나의 '기억들'로 되살려내는 것이 바로 문학이자 문화인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것들이 '나'라는 구체에서 출발해 '세계' 또는 '역사 자체'라는 추상으로 넘어가는 무엇이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경과한 이후의 서구의 역사학이 추상 일변도의 허약함을 미시사(微視史)라는 보약을 통해 보완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할머니의 '이야기들'과 '기억들'을 잊고 지내온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마침내 당위라든가, 진실이라든가 하는 관념들만이 외롭게 떠다니는, 그야말로 뼈대 앙상한 추상으로서의 역사가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 같은 탄식은 물위의 사정에 한정된 것일지도 모른다. 물밑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들'과 '기억들'에 기대어 역사와 문화를 꾸려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제강점기에 대한 강의를 듣고 책을 읽기 전에도 할머니의 왜정시대 이야기를 통해 그것의 선명한 구체, 육질 풍만한 구체를 몸 속 어딘가에 담아두고 있었으며, 박태원의 '천변풍경'을 읽기 전에도 서린동 외갓집의 추억 속에서 복개 이전의 청계천변을 흐르는 서울 사투리의 구수함과 그곳에서 모여 살던 사람들의 '깍쟁이 같은 인정'을 일찌감치 감잡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 문화 역시 새 천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에 이의를 달 생각은 없다. 하지만 앞만 바라보는 사람의 머리에는 지식이 있는 반면, 앞과 뒤를 아울러 돌아보는 사람의 마음에는 지혜가 함께 자리하게 마련이다.

하물며 지금은 역사 속에서 명분과 지혜를 찾는 일이 참으로, 참으로 긴요한 시점이 아닌가. 속담에 '늙은 쥐가 독을 뚫는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독 안에 든 쥐'의 후일담이 아닐까 싶은데, 이것은 노욕을 버린 자들만이, 말하자면 손녀딸을 금쪽 같이 거두시는 마늘쪽 같은 할머니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닐까 싶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다. 나는 이제 젊은 오빠가 되겠다며 큰소리로 우왕좌왕하는 '늙은 쥐들' 말고, 한없이 가벼워진 해탈의 몸으로 항아리를 뚫는 지혜의 화두를 던지는 '그분들'에게 역사와 문화 속의 소중한 자리를 정성껏 마련해드리고 싶은 것이다.

강영희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