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역사」되풀이말자|민주화가 오늘의 난제푸는 열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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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인간사회에서 광명은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가치다. 빛을 향한 인간의 집념은 모닥불에 날아드는 불나방만큼이나 강하다.
「고르바초프」는「스탈린30년」을 역사의 암흑기로 단정했다. 그것은 비밀경찰에 의한 폭력지배 공포정치였다. 그때 소련에선 국민의 권리와 자유가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었다. 영장없는 체포와 고문·처형…. 감옥은 사상범·정치범으로 늘 만원이었다.
무지와 야만이 지배하는 곳엔 미래의 희망이나 발전에 대한 기대가 없다.「스탈린」의 소련은 어둡고 긴터널의 연속이었다.
우리 역사에도 암흑기는 있었다. 일제통치는 잔혹한 어둠의 역사였다. 그 암흑기에 억눌리고 짓밟히던 우리 겨레가 한줄기 빛을 찾아 분기한 것이 3·1운동이다.
68년 전의 오늘, 기미년 3월3일은 고종의 장사날(인산일)이었다. 이 행사를 보려고 지방 사람들이 수일전부터 서울로 몰렸다. 고종의 독살설로 분위기는 더욱 긴장됐다.
3·1운동은 그 의문의 죽음에서 익어갔다. 파고다공원의 만세 소리는 역사의 기폭제였다. 도시와 농촌, 국내와 국외의 구별 없이, 노동자와 농민, 천도교와 불교·기독교의 구별 없이 조선인이 있는 곳은 어디서나 독립선언과 항일 시위가 있었다. 시베리아에서, 미국에서, 만주와 중국, 그리고 일본에서도 독립만세가 울려퍼졌다.
시위자에 대한 총격과 체포, 고문과 처형은 야수적이었다. 여자는 끌어다 옷을 벗겨 성모욕을 가했다. 잔인무도한 이방의 일경이나 할수 있는 것들이었다.
만원의 제암리교회를 방화·총격한 것은 백제 만행의 상징이다. 선교사「스코필드」의 폭로와 미국 신문의 보도가 없었다면 이 범죄는 세계의 눈에서 감춰질뻔 했다. 그때 어느 일본인의 기록-.
『일본군은 부락을 전전하면서 사냥 나온 포수처럼 조선인이 보이기만 하면 총격을 가해 실탄 사격 연습하듯 쏘아댔다. 그 35년은 실로 어둡고 괴로왔던 역사의 암흑기였다. 그러나 그때의 우리 겨레는 오늘 같지는 않았다.
남북 대립이나 지역 감정이 없었다. 이데올로기 싸움이나 권력 다툼도 없었다. 모든 종교가 태극깃발 아래 하나로 뭉쳤다. 2천만이 하나가 되어 일제의 군사통치에 저항했다.
3·1운동에서 지도의 일원화, 참여의 대중화가 이뤄진 것은 우리 역사 발전에서 특이할 일이다.
3·1운동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민족주의운동이라는데 주저할 사람은 없다.
민족주의란 민족의「통일」「독립」「발전」을 지향하는 운동이자 이데올로기다. 경제 발전인 산업화와 정치발전인 민주화는 근대민족주의의 필수 요소다.
민족주의에선 민족이 모든 집단에 앞선다. 민족국가(nation-state)는 가장 우선적인 충성의 대상이다.
일제 암흑기의 우리 겨레는 민족주의로 굳게 결속돼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위기 요인은 그런 결속력이 없다는데 있다.
원래 국제관계란 민족국가들의 대립·투쟁 관계다. 80년대는 국가간의 국익투쟁·발전경쟁이 어느 때보다 심하다. 이데올로기는 종언을 고한지 오래다. 정치동맹국 사이엔 경제전쟁이 한창이다. 우리도 어느새 경제전쟁 참전국이 됐다.
한반도는 세계를 지배하는 미소와 10억의 중공, 경제대국 일본에 둘러싸였다. 그 모두가 약소국을 넘보는 제국주의 전과자 또는 현행범들이다.
지금 우리는 남북이 합쳐 저들과 경쟁하기에도 힘이 부친다. 그런데도 남북대결은 첨예화하고 지역갈등은 여전하다. 권력과 비권의 싸움은 절정같다. 모두가 민족 역량의 낭비다.
지도자들이 진심으로 민족 통합과 발전을 지향한다면 개헌이나 인권보장이 결코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국민 의사와 해결방법이 명백한데도 싸움만 계속되는 것은 국익보다 당리와 사욕을 앞세운 탓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위기상황이다. 이 분열을 극복하고 민즉 에너지를 하나로 묶어 발전의 가속화, 국익의 극대화라는 국가목표를 밀고 나가야 한다.
세계는 급전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권력구조·인권보장등 민주주의의 전제 단계에서 맴돌고만 있을 것인가. 하루빨리 그런 문제를 일괄 타결하고 만국과의 민족 번영·국민복지 경쟁을 벌여 이겨야 한다.
이 과업의 수행은 기미년 이 달에 꽃피었던 3·1정신, 즉 한국 민족주의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민족주의 없이 민족국가가 흥성한 예는 없다.
나라가 작고 무역 의존도가 높은 우리의 민족주의는 배타적 국수주의여서는 안된다. 국민이 중심 세력이 되고 국제협력을 바탕으로한 개방적 민족주의여야 한다.
통합과 발전. 이것은 우리의 지상과제다. 통합은 여야의 타협, 민권과 국권의 조화, 계층간의 공존, 세대간의 상호 이해다. 지금의 우리에게 발전은 일차적으로 정치발전이다. 민주화야말로 우리 사회의 모든 난제를 푸는 어미열쇠다.
지도자의 충성 대상이 국가냐, 자신이냐를 분별할 때 문제는 간단해진다. 그것은 지도자의 자격을 판정하고 애국자를 가려내는 기준이다.
국민의 통합을 저해하면 그는 애국자가 아니다. 민주화를 가로막으면 결코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그런 자는 지도자 대열에서 물러나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낙후된 분야가 정치다. 바로 그 정치가 모든 분야를 지배하는데 문제가 있다. 대등하게 분화된 각 분야가 서로 견제하며 균형 있게 발전해 나가는 개방적 다원체제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우리는 결코 좌절해선 안된다. 실망할 이유도 없다. 경제가 발전하고 교육이 확산되고 종교가 신장되고 근대화·도시화가 진척되는 한 정치발전은 오게 마련이다.
68년전 이날 고종의 장례 행렬에 보내던 약자의 울음을 다시는 울지 말아야 한다. 그 어둠의 역사가 되풀이돼서도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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