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대책보다 트럼프가 더 무섭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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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호 18면

일러스트 강일구

주택시장의 앞길에 불확실성이 깔려 있다.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상황을 맞아서다. 불확실성은 인간은 물론 부동산도 가장 싫어하는 환경이다.


2008년 이후 가라앉은 주택경기를 살리기 위해 줄곧 규제 완화를 해오던 정부의 정책 방향이 ‘규제’로 선회했다. 지난 3일 발표된 ‘실수요 중심의 시장 형성을 통한 주택시장 안정적 관리방안’에서다. 대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가수요로 인해 불안한 시장을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직접적인 수요 억제를 통해서 말이다.


정부 정책의 전면적인 궤도 수정은 아니지만 다시 ‘여름옷’을 꺼낼 수 있다는 신호는 충분히 준 셈이다. 2014년 6월 최경환 당시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내정자는 “겨울에 여름옷을 입은 격”이라는 말을 던지며 대대적인 규제 완화를 추진했다. 그 덕에 그 해 하반기부터 시장이 회복됐다.


[분양권 ‘단타 전매’ 극성]


한여름처럼 달아오른 분야는 분양시장이다. 기존 주택시장의 온기는 수도권 집값이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한 2014년보다 낮다. 수백 대 1 청약경쟁률이 흔하고, 당첨과 동시에 분양권을 파는 ‘단타 전매’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미 지난해 말부터 주택공급 과잉 우려가 나오고 지난 여름부터 분양시장 과열을 지적하는 이가 많았다. 그런데도 정부는 미적거리다 이번에 예상보다 센 대책을 내놨다. 지난 8월말까지만 해도 중도금 대출을 제한하는 정도로 충분하다고 판단해 청약제도는 건드리지 않았다. 서울을 비롯해 수도권 주요 지역의 분양권 전매를 입주 때까지 제한해 사실상 전매를 금지했다. 당첨된 뒤 또 청약하는 ‘회전문 청약’을 막기 위해 재당첨 제한도 도입했다. 국토부 내부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8월부터 올 7월까지 1년 간 전국에서 20차례 이상 중복당첨된 사람이 188명이나 됐다.


정부가 의도한 대로 분양시장 과열은 식을 것으로 예상된다. 인기 지역에서 전매차익을 노린 가수요로 추정되는 상당수 청약자가 빠져나갈 것이다. 전매제한은 분양권 웃돈(프리미엄)의 리스크를 높인다. 기존 수도권 재건축 아파트 전매제한 기간인 6개월까지는 지금 시장상황과 큰 변동 없을 것으로 낙관적으로 예상할 수 있지만 1년 6개월 이상 뒤의 시장은 내다보기 어렵다. 실수요도 다소 움츠러들 수 있다. 가수요의 ‘바람’이 실수요자들의 선택에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높은 청약경쟁률과 ‘조기 완판’에 힘입어 기세등등하던 분양가 상승세도 주춤할 것으로 예상된다.


[강남4구 집값 조정 들어가]


이번 규제를 피한 지역에 ‘풍선효과’가 일부 나타나고 있지만 언제든 전매제한이 묶이는 ‘(청약제도) 조정 대상지역’에 포함될 수 있다. 정부가 신속하고 손쉽게 ‘대상지역’을 정할 수 있게 한 점도 이번 대책의 특징 중 하나다. 5일간의 입법예고를 거쳐 불과 보름 정도 만에 시행할 수 있다.


정부 대책의 주타깃인 강남4구(강남·서초·송파·강동)의 집값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지난주 강남4구 아파트값이 모두 하락세로 돌아서 평균 0.02% 내렸다. ‘마이너스’는 지난 3월 말 이후 7개월여만이다. 이들 지역에 몰려 있는 재건축 추진 단지들의 투자 수요가 줄어들어서다. 앞으로 더 많이 오르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차익을 실현하기 위해 호가를 낮춘 매물이 나오고 있다.


집값 조정은 강남4구 등 일부 지역에 국한되고 전체적으로 매매시장이 가라앉을 것 같지는 않다. 이번 대책이 기존 주택 수요를 누르려는 것은 아니어서다. 지난주 강북지역 집값 상승세는 별다른 변함이 없었다. 물론 마음 놓을 수는 없다. 분양시장과 강남4구 주택시장이 향후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2017~18년 120만 가구 입주물량 나와 ]


그런데 11·3 대책보다 더 ‘무서운 놈’들이 주택시장 앞에 서 있다. 내년부터 크게 늘어나는 입주물량이다. 당장 내년부터 2018년까지 예년보다 50% 가량 급증한 연간 60만 가구씩 120만 가구가량이 들어선다. 주택건설 인·허가를 받은 2014년 51만 가구, 지난해 76만 가구가 순차적으로 준공하는 것이다. 지난해 76만 가구는 역대 최대다. 과거 노태우 정부의 200만 가구 주택공급 계획에 따라 집이 대규모로 지어지던 1990년 75만 가구가 이전 최대 기록이다. 1980년대 말 절대적인 주택 부족으로 급등하던 집값은 89~90년 총 120만 가구의 주택건설 인·허가 이후 91년부터 하락세를 보였다. 당시 주택보급률이 90%도 되지 않았지만 현재는 2014년 기준으로 103.5%다. 인·허가 숫자는 지금과 1980년대 말이 비슷하지만 그 무게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여기다 난데없이 나타난 트럼프가 주택시장을 짙은 안개 속으로 끌고 가고 있다. 구매력을 떨어뜨리는 주택시장 외부의 악재는 내부의 공급과잉과 맞물려 악영향을 증폭시킬 수 있다.


그래서 11·3 대책보다 트럼프가 더 무섭다. 비수기에 접어드는 올 겨울 주택시장의 겨울잠이 편치 않게 됐다.


안장원 기자ahnj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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