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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사령탑은 빨리 세우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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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호 30면

갑자기 한순간 우리 사회의 모든 것들이 블랙홀로 빠져들었다. “이게 나라냐”라는 말이 폐부를 찌른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부정부패 스캔들을 훨씬 뛰어 넘는 권력형 사건이다. 국민들은 당황하고 또 분노하고 있다. 법을 가르치고 있지만 학생들 앞에서 법대로 하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워진다. 우리가 법대로 하는 필부의 삶을 살고 있을 때 누군가는 법위에 군림했다. 법을 지켜줄 것으로 믿었던 공직자들은 법에 눈을 감았고, 정의를 세워 주리라 믿었던 검찰은 국민의 기대를 접게 만들었다.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사회가 되었다. 괴담과 유언비어 수준으로 치부했던 의혹들이 모두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신뢰의 상실, 그것이 이번 게이트가 남긴 가장 큰 후유증일 것이다.


정부의 권위도 사라졌다. 대통령에게 2선으로 물러나라고 한 배경에는 권위의 상실이 있다. 법치국가에서 국가의 정책은 법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법이 다가 아니다. 법의 집행을 채우는 것은 권위다. 로마인들은 시민 스스로가 받아들이고 따르게 하는 것을 권위라고 하고, 반면 권력이 순응을 강요하는 것을 권위주의라고 정의했다. 권위는 권력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먹고 자란다. 이제 국민들은 더 이상 정부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분노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우리를 둘러싼 주위의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것은 미국 대선 결과다.


앞으로 외교·안보·통상을 포함한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이슈들이 제기될 것이다. 방위비 분담, 북핵문제,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환율 등 굵직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트럼프의 당선을 계기로 이렇게 장기간 국정공백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공감을 얻어가고 있다.


여당은 트럼프 효과를 과장함으로써 반사적 이익을 얻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친박 의원들이 앞서 나와 위기와 우려를 이야기 하는 것은 오히려 국민적 반감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 트럼프라는 외생변수가 명분과 기회를 주기에는 국민들이 너무 많이 화가 나있다.


트럼프의 당선일, 우리를 비롯한 세계 주요 증시에서 주가는 큰 폭으로 하락했지만 다음날 바로 반등했다. 환율도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시장은 민감하기도 하지만 그 만큼 복원력도 뛰어나다. 하지만 우리 경제 체질은 이미 약해진 터라 예상되는 불확실성과 충격에 대비한 시나리오를 짜야 한다. 경제의 속성은 흐름이다. 한번 흐름을 놓치면 회복하는 데 상당한 시간 동안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러나 항상 그 고통의 몫은 성실한 삶을 살아온 시민들이 나누어 져야 했다. 한진해운은 직원 560명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해운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계부채는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 빚 내서 집을 사라는 부동산 정책은 부동산 가격을 폭등하게 했다.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는 곧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 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기업들과 싸워야 하는 판에 사리사욕을 채우는 어이없는 강제모금에 발목이 잡혀있다. 경제는 먹고 사는 문제라 걱정이 큰 것은 당연하다.


한편, 모금에 참여했던 기업 총수들에 대한 검찰의 수사도 이어지고 있다. 기업들은 모금을 강요받았다는 점에서 억울할 것이다. 하지만 모금에 대가가 있었다면 본질은 정경유착이다. 선진국에서는 정경유착의 관행이 사라지고 의사결정의 과정은 투명해지고 있다. 영국은 로비스트법을 만들어 로비스트들을 모두 등록시키고, 정부관료 누가, 누구를, 무슨 정책 때문에 만나는지까지 국민들에게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처럼 퇴행적이지 않다. 정치가 돈에 기생하고 시장의 원리를 거슬러 친소관계에 따라 인위적인 자원배분이 이루어지는 관계라면 아무리 규제를 풀어도 경제의 체질은 허약해지게 마련이다. 이참에 잘못된 관행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할 것인가.


지금 우리 경제의 사령탑은 어정쩡하게도 두 사람이다. 유일호 경제부총리와 임종룡 부총리 내정자이다. 이제는 여야가 합의를 해서 둘 중 한사람으로 정하든가 아니면 경륜과 실력을 갖춘 중량감 있는 인사를 영입해야 한다. 이번 국정농단사태의 책임을 묻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의 핵심에 총리직이 있다. 구체적으로 총리의 지위와 권한의 문제이다. 그런데 이를 둘러싸고 야당과 여당, 청와대의 셈법이 각기 다르다. 총리의 역할과 권한에 대해서 여전히 모호한 입장으로 일관하는 대통령과 여당은 움켜쥐고 있는 권력의지를 내려놓아야 한다. 대신 야당도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합의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래서 일단 시급한 경제부총리부터 국회에서 먼저 정하자는 것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지 몇 주가 지났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깊은 상처와 허탈감으로 인해 사람과 시스템 모두 아직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딛고 일어서야 한다. 19년 전 우리가 외환위기의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분연히 일어났듯이 말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잘못된 관행과 제도를 고치고 정의와 신뢰를 다시 세워야 한다.


정의롭지 않은 것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우리 사회에 여전히 큰 희망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도 그 희망을 가지고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말한다. “우리 사회는 법 앞에 평등하지 않았다. 권력은 법을 정치의 이름으로 남용했다. 법을 지켜내야 하는 사람들은 눈을 감았다. 적어도 성실하게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국가의 역할이다. 그리고 그 역할 가운데에 바로 우리들이 있어야 한다.”


최승필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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