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병욱<편집부국장>맺힌 마음 풀어주는 게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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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월7일은 매캐한 연기 속에서 그럭저럭 지나갔다. 그러나 종철이로 인해 국민들 가슴마다에 생긴 멍울은 치유되지 못하고 남아있다.
이 대명천지에서 종철이가 당한 것 같은 참혹한 일이 다시는 없으리란 확신이 서기까지 그 멍울은 가셔 질 것 같지 않다.
그 후에 생긴 수많은 위원회, 이곳 저곳서 행해진 맹서와 다짐이 개선의 확신을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도 고비만을 넘기려는 호들갑과 말만의 성찬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고비만 넘기면 쉽게 잊혀지는 일들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이번 일은 세월이 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자기일처럼 와 닿는다.
고문에 대해선 스스로 또는 주변에서 직간접으로 겪어본 사람이 꽤나 있다. 또 종철이의 참혹한 죽음은 자식 가진 부모에겐 모두 남의 일 같지 많은 일이고 더구나 동료를 빼앗긴 젊은 학생들의 심정이야 일러 무엇하겠는가. 이렇게 직접 연관은 없다해도 슬픔과 분노의 공감대가 국민 저변에 깊고 넓게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지난7일 당국의 철통같은 저지·진압태세에도 불구하고 연도의 반응이 지난해 신민당 서울대회 때와는 좀 달랐다. 왜 그러했겠는가. 그 저변의 심정을 헤아려야한다.
이번 경우는 다른 때의 일과성 흥분이나 격정과는 다르다. 국민들은 슬픔과 분노를 넘어 이 나라에서 이제는 고문같은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행위를 종식시키고야 말겠다는 결의에 차 있다.
가두에서 추모의 움직임을 저지한다거나, 새롭게 국민의 관심 끌 일이 생긴다고 해서 이런 결심이 흔들릴 것 같지는 않다. 오직 고문을 추방하겠다는 다짐이 행동으로 실천되는 것만이 분노와 슬픔을 달래는 길이다. 이제 말은 소용없다. 실천, 그것만이 문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7일의 추도집회를 원천 봉쇄하겠다고 나선 건 어딘가 이가 맞지 않는 모습이다.
종철이의 죽음이 정치인들에 의해 정치게임으로 이용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 슬픔과 분노를 표시하는 건 자연스런 인성의 발로다. 또 이런 일이 다시없도록 자구노력을 하는 것도 불온하게 볼일은 결코 아니다.
추도대회를 저지하게된 집권 측 나름의 사정과 판단이 있겠지만 그러한 경찰력에 의한 단호한 저지가 국민의 눈에 어떻게 비치고 세계여론에 어떻게 투영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혹시 고문 치사 같은 인권유린이 다시없도록 하겠다는 거듭된 다짐에 부정전인 그늘이라도 드리우면 어쩌겠는가.
2월7일의 사태에 대해선 다른 정치문제와는 다르게 보는 흐름이 있다. 때문에 추도회로 인해 연행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여느 때와는 다른 신중한 처리가 요구된다.
종철이의 죽음이후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정치는 제자리를 못 지키고 너무 뒷전에 처져있는 모습이다.
인권의 보호와 신장은 정치가 추구하는 목표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인권문제가 정치화되는 건 그래서 불가피하다. 인권유린의 진상을 밝혀 책임소재를 따지고 재발방지를 위한 정치적·제도적 보강책을 강구하는 것은 마땅히 정치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런데 그동안 여야 정당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정치적 인책의 폭을 넓히고 임시국회를 여는 데까지는 여야가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는 나가지 못했다.
국회에 인권특위를 두기로 했던 합의는 특위에 국정조사기능을 주느냐 마느냐에 걸려 깨져 버리고 말았다.
정치는 뒤로 물러선 채 야당은 재야세력의 선도로 2·7대회의 길로 밀려갔고 집권당은 공권력에 그 대응을 맡긴 채 뒷전에 서 버렸다.
정치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순간에 집권당은 국정조사권 발동에 너무 인색했다. 여야간의 합의가 어떠했든 간에 인권특위를 만든다면서 국정 조사권을 부여하지 않는 대서야 국민을 납득시킬 수 있겠는가. 집권 측의 진지성에 대한 회의만 가져왔을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뛰쳐나갈 구실만 노리던 야당에 장외투쟁의 명분까지 제공하고 만 격이다.
야당에도 문제가 있기는 매한가지다. 박군 사건을 무슨 정치공세의 호재라도 만났다는 듯이 정치게임에 이용하려고 급급하는 인상이었다. 중앙당과 지구당 사무실에 부랴부랴 분향소를 설치하더니 장외 추도대회에 앞장을 서는가 하면 두건을 쓰고 참석하자는 얘기까지 나왔다니 말이다. 이런 너무 노골적인 태도는 보기에도 안 좋고 상황개선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는 다시 정치권에서 국민의 가슴에 맺힌 멍울을 풀어주는 일을 맡아야겠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이 문제가 3월의 학원가로 이어지고 ,개헌자체에도 결정적 차질을 빚게 될는지 모른다.
이런 무참한 일이 다시는 없겠구나 하는 국민적 확신이 서도록 해야 한다 인권의 존중이 없이는 결국 민주화도 ,개헌도 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 확신을 이룩해 낼 책무가 정치권 ,특히 집권 여당에 지워져 있다. 그러자면 우선 정치가 제자리를 찾아야 하고, 그에 앞서 야당이 원내를 가장 유효한 정치의 양으로 생각하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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