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의 개혁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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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중공의 그것처럼 소련사회를 개방으로 유도하는 개혁은 필경에 가서는 동서관계전반은 물론이고 한반도 정세에까지 중요한 변인으로 작용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중공의 개혁노선이 한-중공간 접촉의 확대, 북한-중공간 갈등의 심화와 무관하지 않았듯이 소련의 당내민주화나 경제의 개방노선이 정착된다면 그것 또한 한편으로는 교조주의적인 폐쇄사회를 고집하는 북한과 크든 작든 마찰을 빚고 한-소관계 개선에 필요한 환경을 조성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이런 이유때문에 우리는 소련공산당 제1서기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의 추이를 비상한 관심을 갖고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85년3월 당제1서기에 취임한 「고르바초프」는 지난 2년간 꾸준히 경제개혁, 문화적인 자유화, 정치적인 당내민주화를 추진해왔다. 그런 개혁노선이 하나의 큰 전진을 기록한 것이 바로 당중앙위 전체회의에서 「고르바초프」가 당간부를 복수후보 중에서 비밀투표로 선출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지금까지 소련의 고급당료선출방식이 단일후보에 거수투표였던것에 비해 「고르바초프」의 제안은 거의 혁명적이라고 할만하다.
시민사회의 성립을 거치지 않고 농노사회에서 바로 사회주의사회로 이행한 소련에서는 봉건적인 종속의식이나 연고주의 감각의 잔재가 당의 관료주의와 결합하여 고집스러운 보수체제를 유지해왔다.
취임초부터 제한적인 개인기업허용, 경제운용의 지방분권화, 인센티브도입, 외국과의 합작기업 승인등의 개방적인 경제개혁을 추진해온 「고르바초프」에게 당과 관료층의 보수체질은 하루빨리 청산하지 않으면 안될 장애물일수밖에 없었다.
당지도부의 보수파는 「브레즈네프」의 네오스탈린주의 분파로 85년3월 제1서기 선출때는 「빅토르·그리신」 모스크바시당부 제1서기를 대항후보로 내세워 「고르바초프」와 대립했고,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 대한 반대세력의 최후, 최대의 보루 역할을 해왔다.
「고르바초프」의 입장에서 보면 경제개혁의 추진에는「당내민주화」가 전제되어야하고, 당내민주화는 「브레즈네프」파의 거세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치국 개편에 착수하여 이번 중앙위전체회의에서 「딘무하메드·쿠나예프」(전 카자흐공화국당제1서기)를 최종적으로 축출하여 정치국안에는 「브레즈네프」파의 거두요, 우크라이나공화국의 당제1서기인 「블라디미르·시체르비츠키」 한사람만을 남기게 된 것이다.
소련공산당 정치국과 서기국은 이제 개혁노선을 지지하는 「고르바초프 사람들」의 지배하에 들게되었다. 당중앙위전체회의는 폐막에 앞서 채택한 결의안에서 「고르바초프」제안의 대강을 지지하고, 말단 공장에서 권력의 핵심부에 이르기까지의 민주화를 위한 법적인 틀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시민권을 보호할 사법적인 개혁까지 촉구했다.
그러나 「시체르비츠키」가 정치국에 살아남고 당중앙위 결의가 복수후보와 비밀투표를 통한 당간부선출방식에는 언급하지 않는 점등을 보면 반대세력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다.
현실감각이 뛰어나다는 「고르바초프」가 중공의 등소평처럼 보수파와의 대립과 타협을 어떻게 조화시키면서 소련사에 전례가 없는 개혁정책을 추진할 것인지는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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