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엄마가 내 인생 살아줄거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우리 앞집부부는 중2짜리아들 성적이 시원찮다고 대판 싸우더니 부인이 직접 가르치겠다며 영어·수학을 배우러 다닌대요.』
『요새 「엄마과외」가 유행이라더니…. 고등학교까지도 가르칠수 있을까요.』
지난해 12월하순. 서울강남변두리 신흥아파트단지 Y서예학원.
붓과 벼루를 챙기면서 자녀들의 성적얘기를 주고 받는 30∼40대 초반 주부 수강생들의 대화다.
『두고 보구려. 그게 과연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엄마과외」라면 일찌기 경험했던 L씨(39)는 쓴읏음을 지었다. 그짓을 3년이나 해보지 않았던가. 아들이 중학생이 되면서 실력이 달려 그만두었더니 성적은 급전직하로 떨어졌고, 공부라면 머리를 내둘러 속이 상한 나머지 여고때 취미도 살릴겸 머리를 식히려고 서예학원을 찾은 L씨였다.
중1 아들이 학년말 시험을 며칠 앞둔 때였다. 잔소리는 않겠다고 무던히 버티던 L씨는자신도 모르게 아들의 방문을 열어젖히며 버럭 소리를지르고 말았다.
『너는 기타만 칠거야? 시험때만 되면 늦도록 싸다니다가 들어와서는 이렇게 엄마속을 뒤집어 놓아야돼!』
아들 A군(13)은 기타를 한쪽으로 밀쳐놓더니 갑자기 라디오의 볼륨을 한껏 올렸다. L씨는 뺨이라도 한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제하면서 목소리를 애써 누그러뜨렸다.「기분이 상해 시험을 망치지는 않게 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이게 다 널 위한 걱정이란 걸 너도 알잖니』
아들은 별 우스운 소릴 다듣는다는듯 코웃음치며 아예 반말지꺼리로 빈정거렸다.
『엄마가 내대신 살아줄거 아니잖아?』
할말을 잃은채 어지럼증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밖으로 나온 L씨는 비로소 자신의 교육방식에 대해 밑바닥부터의 회의에 빠졌다.
온갖 희망과 기대가 걸린 아들을 이른바 우등생 대열로 끌어올리기까지의 점수밖에 안중에 없던 나날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4년전 여고동창 망년회에서였다. 「1등」이니 「올백」(전과목 백점) 타령을 지겹도록 들은 L씨는 결심했다. 당분간 어떤 모임에도 일체 나가지 않기로 했다. 부업삼아 해오던 출장요리사일도 그만뒀다.
「아들을 우등생으로 만드는일보다 더 급한 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L씨는 심한 충격을 받았고 열등감을 주체하지 못했었다. 아들 A군은 4학년이 다 되도록 우등생은 커녕 중간밑에서만 맴돌았던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아들이 학교에 가고나면 전과지도서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아들이 돌아오면 책상앞에 마주 앉혔다. 예습·복습·숙제는 물론 시험때면 모의고사문제를 스스로 출제, 채점했다.
『이거 비상사태로군』
고졸이라는 학력때문에 공무원생활이 재미가 없다고 말해오던 남편도 그래서 꽤나 협조적이었다.
L씨의 극성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동네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 집을 찾아다니며 읽는 책, 잠자는 시간은 물론 심지어 「우등생식단」이란 것까지를 캐물었다. 소득은 없었다. 누구도 쉽게 말해주려하기 않았다.
그런 가운데 A군의 성적은 점점 나아졌고 1년쯤 지나자 반에서 1,2등을 다투게됐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너희 엄마가 치맛바람을 일으겨 우리가 손해를 분다』며 시샘하는 아이들에게 걸핏하면 매를 맞고 들어왔다.
구로동에서 명일동으로 집을 옮겼다. 아들은 계속 백점소식으로 L씨 부부를 기쁘게했다.
바로 그 아들이 중학생이 되면서 성적은 바닥을 향해 끝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엄마과외」를 계속할 수가 없게 되면서였다. 자신의 실력으로 가르칠수 없고 감시와 잔소리만 나날이 늘어갔다.
학교에서 돌아온 A군이 하루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승철이가 공부 잘하는 애들 들러리노릇이 지겹다더니 열흘째 학교에 안나와요.』
마치 「나도 그런 기분이예요.』 하는 소리로 들렸다. L씨는 「다시는 잔소리를 하지않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더구나 장남인 A군에 매달려 팽개쳐뒀던 5학년 딸이 계속 상위권에서 공부를 잘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일이 닥달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굳혔다.
영어· 수학강좌에라도 나갈까 하던 생각도 완전히 버렸다.
서울 이수중 김철교교감은 『「엄마과외」는 엄마의 욕심이 앞질러 공부에 염증만 더해준다』며 『예습·복습만 챙겨 스스로 공부하도록 환경을 은연중에 조성해주는것이 최선의 「과외」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김경희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