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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제동 걸린 메이의 브렉시트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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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 탈퇴를 향해 질주하던 영국의 테리사 메이 호에 급제동이 걸렸다. EU 탈퇴 절차를 규정한 리스본 조약 50조를 발동하는데 의회 동의가 필요하다는 법원 결정이 나오면서다. 의회엔 EU 잔류파가 다수다. 브렉시트의 속도와 방향 모두에 의회의 입김이 강하게 반영될 수밖에 없게 됐다.

런던 고등법원은 3일 "50조 발동권이 정부에 있지 않다"고 결정했다. 사전 의회 표결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메이 정부는 그동안 50조 발동이 '국왕 특권(royal prerogative)'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었다. 중세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특권으로 전쟁 선포나 외국과의 조약 체결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투자매니저 지나 밀러 등 원고들은 의회가 최종 결정 주체여야 한다고 반박했다. 우선 법률은 법률로만 폐지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1972년 영국이 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할 때 '유럽공동체법'이 제정된 만큼 이의 폐지 또한 의회의 결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권 제한에 대한 결정은 법률로만 가능하다는 논거도 제시했다. 브렉시트로 EU 시민으로서 누렸던 권한도 박탈되는 만큼 의회의 법률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재판부는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의회가 국가의 최고 결정기관이란 의회 주권을 재확인한 셈이다.

정부는 "실망스러운 결정"(리엄 폭스 기업부 장관)이라며 대법원에 상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최종 결정은 12월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대법관 11명 모두 심리에 참가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렇더라도 정부로선 타격을 입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영국 BBC 방송은 "판을 흔드는 결정"이라고 했다. "메이가 뺨을 맞았다"는 표현도 나왔다.

일단 메이 총리가 그간 호언해왔던 내년 3월 말 이전 50조 발동이 미지수가 됐다. 또 브렉시터 장관들이 주도하는 EU 단일시장으로부터 이탈 등 EU와의 강한 단절(Hard Brexit·하드 브렉시트)도 어려워졌다는 전망이다. 의회 다수는 잔류파인데다, 탈퇴파 중에도 EU로부터 탈퇴하더라도 EU 단일시장엔 남아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이들이 있어서다. 보수당의 선거 공약도 "탈퇴하더라도 EU 단일시장엔 남는다"는 것이었다.

다만 의원들이 50조 발동 자체를 막긴 어려울 것이란 예상이다.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도 "국민투표 결과를 존중한다"면서도 "브렉시트 조건에 대한 투명하면서도 분명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일각에선 브렉시트 백지화 전망까지 나왔다. 영국독립당의 패트릭 오플린 유럽의회 의원은 "(선출직인) 하원들은 감히 브렉시트를 거부할 순 없을 것"이라면서도 "상원은 어떨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비선출직인 상원에선 EU 잔류 의사도 강하다. 현지 언론들은 "가뜩이나 복잡하고 미묘했던 브렉시트로 가는 길이 더욱더 복잡해지고 미묘해졌다"고 분석했다.

당장 시장은 크게 반색했다. 브렉시트 국민 투표 이후 추락을 거듭하던 영국 파운드화가 법원 결정 이후 3주 만에 1.24달러으로 올라섰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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