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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 담은 성금이 아쉽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세밑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정례 행사처럼 되고 있는 불우이웃 돕기가 철을 맞았다.
그렇건만 올해 고아원·양로원을 찾는 나눔의 발길은 예년보다 눈에 띄게 적고 각시·도에 마련된 성금접수 창구에도 유난히 찬바람만 스산하다고 한다.
한때 반짝하는 일과성 행사란 인상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 동안 연말 불우이웃 돕기는 그늘진 곳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잠시나마 위안을 주고 온 사회가 함께 살아간다는 공동의 인식을 나누는 뜻깊은 계기가 되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나눔의 인정이 올 따라 유난히 줄고 온기가 식은 것은 웬일일까.
실망스런 정치에 쌓이고 쌓인 울분이 불우이웃에 대해서조차 무관심으로 엇나간 것일까. 아니면 향락소비 풍조에 먼 눈과 들뜬 가슴 탓에 가난하고 불행한 이웃들을 그만 잊어버리고만 것일까.
그러나 썰렁한 이웃돕기 창구와는 달리 기탁자의 이름과 얼굴이 화면에 방영되는 TV방송국에는 고사리 손의 어린이까지 줄을 이어 대조적이다.
아무리 염량세태 라지만 정성을 생명으로 삼는 성금에서조차 한눈에 두드러지는 이 명암의 대조는 성금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다시 곰곰 생각게 한다.
성금이란 말 그대로 정성으로 내는 돈이다. 그렇기 때문에 액수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정성의 크기와 깊이에 그 값어치가 비례한다.
그 어떤 보상을 기대하거나 칭찬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인정의 표현, 그것이 바로 성금을 내는 마음의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
생색이 나는 쪽으론 사람들이 줄을 서고 그렇지 못한 곳엔 발길이 끊긴다면 그것은 타산이지 결코 성의의 표현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어느 나라보다 성금 거두기를 좋아하고 그 종류도 많은 것 같다.
독립기념관건립·올림픽 기금조성 성금은 그렇다 하더라도 전국체전·소년체전·가로정비·도시 미화·회관 건립 등 크고 작은 일이 있을때마다 으례 성금소리가 나온다.
그런 성금일수록 거두는 과정에서 공무원까지 개입하니 업체라도 가진 사람이면 유형무형으로 주눅이 들어 안낼 수도 없다.
어떤 때는 성금에 목표액을 정해놓고 모금실적을 시장·군수의 행정능력 평가기준으로 삼는 경향조차 보여 경쟁을 유발하기도 한다.
몇해전 전국체전을 치른 어느 지방에서는 동 단위·업체·단체별로 할당액을 정해놓고 정쟁을 붙이는 바람에 승인 받은 목표액 3억원의 26배나 되는 77억원을 거둬들여 말썽이 된 사례도 있었다.
같은 명목의 성금을 반상회·직장·학교에서 식구수대로 각각 따로 내야하니 2중·3중의 부담이 예사다.
기업은 또 기업대로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다.
전경련 산하 한 연구소가 조사한 것을 보면 지난 한햇동안 우리나라 기업들은 기업 당 6억8천만원에 이르는 성금과 기부금을 낸 것으로 돼있다. 이러다간 성금·기부금의 액수가 기업이 내는 세금을 웃돌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래서 세금이 아니라 준조세란 말이 생겼는지 모른다. 기업이 부담하는 이러한 「준조세」는 1백50종이 넘는 것으로 드러났다.
기업인이 배당 받은 개인재산으로 분수에 맞는 성금을 낸다면 나무랄 까닭이 없다. 그것은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이란 차원에서 마땅히 권장될 일이다.
그러나 구제 금융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적자 투성이 부실 기업인이 회사 돈으로 그것도 남보다 먼저 거액을 내놓는다면 문제가 크다.
그것은 경영 부실이나 비도덕적 행위로 실추된 해당기업의 이미지를 성금의 액수로 호도 하려는 일종의 속임수요, 허세로밖에 볼 수 없다.
회사 돈을 물 쓰듯 쓴다는 것은 근로자에게 돌아갈 임금의 몫을 잠식하고 생산원가를 높여 결국 최종부담은 소비자에게 전가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업의 국제경쟁력도 떨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기업과 가계와 단체가 툭하면 성금 아닌 성금을 세금처럼 내야하는 사회분위기는 고쳐져야 한다.
특히 정부가 마땅히 예산으로 해야할 일부 공공적 사업의 경비까지 기업이나 민간에 떠 맡기는 것은 민원을 불러일으키는 관폐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경비부과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따라 납세의무를 진다」라는 조세법정주의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정부나 지방자치 단체의 세입과 세출은 하나의 예산으로 명료하게 작성·집행돼야 한다는 예산제도에도 어긋난다.
관이 앞장서서 실속을 챙기는 듯한 분위기가 일상화되면 시민들의 자발적인 호응은 무디어 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참여하고 싶던 사람도 반발심이 생긴다.
실제로 성금이 아쉬운 양로원·고아원에 자선의 손길이 뜸해진 것도 성금의 무분별한 과다징수로 일반시민들의 선의가 고갈된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볼 일이다. 더우기 한꺼번에 5억원이다, 10억원이다 하는 「성금」을 어렵잖게 내던지는 것을 지켜보는 소시민들은 그 엄청난 액수에 기가 질리고 무력감이 느껴져 애써 아낀 푼돈을 내놓고 싶은 의욕을 잃을 지도 모른다.
때마침 불우이웃 돕기와 함께 「댐」건설성금 모금 운동이 한창이다.
「평화의 댐」을 쌓는 일은 나라의 안보와 생존권을 지켜야겠다는 국민들의 무언의 합의이다. 여기에는 성금의 액수가 척도가 아니라 국민의 응축된 정성과 결의, 그리고 자발적 참여의식이 요체이다. 그밖에 어떤 반대급부나 생색 같은 기대는 전제가 될 수 없다.
작은 시냇물이 알게 모르게 한데 모여 큰 강을 이루듯이 국민 하나 하나의 정성이 꾸준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넘쳐흘러 거대한 평화의 방벽이 세워지도록 흔쾌하고 자발적인 모금이 되었으면 한다. 【금창태<편집국장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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