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오지 않을 것 같던 가을이 어느 날 불현듯 시작되더니 이내 봇물 터진 냇물처럼 하루가 다르게 겨울로 흘러가고 있다. 이미 추수가 끝난 논도 보이고, 쌓아 놓은 들깨의 고소한 내음도 풋풋하기만 하다.
동네 산책길에 도토리를 주우러 갔다. 집 주위에는 소나무 숲이 주를 이루는데 큰 아이 학교 가는 길 언덕 옆으로 건실해 보이는 상수리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이 있어 처음으로 그 숲길을 걸었다. 아직 겨울까지 여유가 있어서일까, 주변에 사는 다람쥐가 게으른 걸까. 오솔길 위에는 적잖은 도토리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툭! 툭! 사방에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 아이들은 조그만 손 가득 도토리를 주어 들고 서로 자랑하기 바빴다. 그래 봐야 도토리 키 재기거늘!
그림으로 그릴 몇 개만 고르고, 야생동물들을 위해 모두 두고 오기로 했다. 아이들은 모은 도토리를 나무 밑에 잘 쌓아두었다. 어느 다람쥐가 이 수북한 도토리 더미를 발견하고 기뻐 기절할지도 모르겠다.
산책은 계속 이어졌다. 산에도 붉은빛이 스며들고 있다. 매섭다는 파주의 겨울에 대한 걱정이 없지 않다. 다람쥐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겨울을 위한 준비는 필요할 터다. 하지만 이 순간 이토록 아름다운 오솔길 위에서 그런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싶어졌다. 바쇼는 계절이 지나가는 것을 보며 ‘시간 그 자체가 쉴 줄 모르는 여행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동행 길에 가장 달콤한 휴게소에 머물러 있는 중이다.
이장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