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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나무 아래서 도토리 키를 재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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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호 22면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를 참나무라 뭉뚱그려 부른다. 하지만 참나무는 나무의 한 분류를 말할 뿐 정작 참나무라는 이름의 나무는 없다. 참나무에는 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부터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등이 있는데 변종이 많아 전문가들도 각각을 구분해 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 가운데 도토리의 깍정이를 보고 얼추 무슨 나무인지 알아낼 수 있어 우리 같은 일반인에게는 고맙다. 털이 많이 난 깍정이의 도토리를 만드는 건 상수리나무와 떡갈나무이고, 밋밋한 것은 신갈나무나 갈참나무 등이다. 특히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의 도토리는 더 큰데 이는 다른 도토리나무가 그해 열매를 맺고 떨구는 것과 달리 두 해 동안 자란 것이기 때문이란다.

도토리나무 근처에 가지가 잘려 떨어진 걸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심술궂은 바람도, 부지런한 다람쥐의 소행도 아니다. 범인은 바로 도토리 거위벌레다. 거위벌레는 도토리에 알을 낳아 번식하는 곤충이다. 일단 익지 않은 튼실한 도토리를 골라 안에 알을 낳고 예리한 이빨로 나뭇가지를 잘라 떨어뜨린다. 이때 가지에 붙은 잎은 추락 시에 속도를 늦추어 주고, 바닥에 떨어지는 충격도 줄여 준다. 그렇게 도토리 안에서 부화한 애벌레는 도토리를 모두 먹은 후 땅속으로 들어가 겨울을 나는 것이다. 곤충의 놀라운 습성에 감탄이 나온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로 개체 수가 늘어나 골칫덩이가 되었다. 결론은 역시 인간이 문제다.

쉽게 오지 않을 것 같던 가을이 어느 날 불현듯 시작되더니 이내 봇물 터진 냇물처럼 하루가 다르게 겨울로 흘러가고 있다. 이미 추수가 끝난 논도 보이고, 쌓아 놓은 들깨의 고소한 내음도 풋풋하기만 하다.


동네 산책길에 도토리를 주우러 갔다. 집 주위에는 소나무 숲이 주를 이루는데 큰 아이 학교 가는 길 언덕 옆으로 건실해 보이는 상수리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이 있어 처음으로 그 숲길을 걸었다. 아직 겨울까지 여유가 있어서일까, 주변에 사는 다람쥐가 게으른 걸까. 오솔길 위에는 적잖은 도토리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툭! 툭! 사방에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 아이들은 조그만 손 가득 도토리를 주어 들고 서로 자랑하기 바빴다. 그래 봐야 도토리 키 재기거늘!


그림으로 그릴 몇 개만 고르고, 야생동물들을 위해 모두 두고 오기로 했다. 아이들은 모은 도토리를 나무 밑에 잘 쌓아두었다. 어느 다람쥐가 이 수북한 도토리 더미를 발견하고 기뻐 기절할지도 모르겠다.


산책은 계속 이어졌다. 산에도 붉은빛이 스며들고 있다. 매섭다는 파주의 겨울에 대한 걱정이 없지 않다. 다람쥐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겨울을 위한 준비는 필요할 터다. 하지만 이 순간 이토록 아름다운 오솔길 위에서 그런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싶어졌다. 바쇼는 계절이 지나가는 것을 보며 ‘시간 그 자체가 쉴 줄 모르는 여행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동행 길에 가장 달콤한 휴게소에 머물러 있는 중이다.


이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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