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주식 전광판 37년만에 역사 속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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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쪽 벽을 큼지막하게 차지한 전광판의 깨알 같은 숫자들이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시시각각 변한다. 전광판 앞 의자에 앉은 이들의 표정과 태도는 각양각색이다.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쪽잠을 청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손에 쥔 수첩과 전광판을 연신 번갈아보며 초조한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이도 있다.

숫자의 색깔에 희비가 엇갈리고 나직한 탄식과 흐뭇한 웃음이 뒤섞이는 곳, 증권회사 객장이다.

앞으로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없게 됐다. 객장의 상징이었던 시세 전광판이 올해 말이면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태어난 지 37년 만에 역사의 유물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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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현재 시세 전광판을 운영하는 곳은 대신증권 뿐이다. 대신증권은 서울 여의도 본사 1층에 설치된 주식 시세판을 올해 말까지 운영한 뒤 철거하기로 했다. 12월에 서울 명동으로 본사를 이전하면 주식 시세판을 따로 설치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증권은 우리나라 증권업계에서 처음으로 디지털 전광판을 도입했다. 대신증권 창업주인 고 양재봉 명예회장이 경영하던 1979년의 일이다.

이전에는 증권사 영업점 직원이 한국거래소에서 일정 시간마다 스피커로 알려주는 주가를 칠판에 받아 적었다. 이후 다른 증권사들도 디지털 전광판을 앞다퉈 설치했다. 자동으로 숫자가 바뀌는 전광판 앞은 시세를 확인하려는 투자자들의 발걸음으로 늘 북적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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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주식 시세판. [중앙포토]

그러나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객장으로 향하는 투자자들의 발걸음을 묶었다. 집에서 직접 주식을 사고 팔 수 있는 홈트레이딩시스템(HTS)에 이어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이 잇따라 보급되면서 영업점의 시세 전광판은 상징적인 '골동품'으로 전락했다.

시세를 확인하러 영업점을 찾는 고객의 수는 줄었는데 공간만 차지해서다. 수익성 악화로 고전 중인 증권사들이 '비용 절감'에 나서면서 시세 전광판은 애물단지가 됐다.

여의도 대신증권 1층 영업점의 시세판은 국내 1호라는 상징성 때문에 그동안 철거의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본사의 새로운 둥지로 동행하진 못하게 됐다.

대신증권이 떠난 건물은 신영증권이 인수하기로 했다. 신영증권은 '대신증권 1층 객장'을 복합 라운지 형태의 북카페로 새롭게 꾸밀 예정이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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