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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 강경파 무마가 남은 과제|엔릴레 선임 이후의 필리핀 정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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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주말의 쿠데타 음모의 분쇄, 그리고 「엔릴레」국방장관의 전격해임으로 지난 9개월 동안 격랑을 헤쳐오던 필리핀정국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됐다.
「엔릴레」 국방장관의 전격해임은 그가 「아키노」 정부에 잔류한 「마르코스」 체제의 유일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아키노」 대통령 정부로서는 그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출발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2월 혁명 때와 7월 반혁명사건 때도 그랬듯이「아키노」 대통령으로서는 이번 쿠데타의 음모를 사전에 분쇄하는데 군부의 지지를 효과적으로 이끌어내 정국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정치력부족이라는 그 동안의 의구심을 어느 정도 불식시킬 수 있게 됐다.
특히 군부의 지지를 과신하고 혁명정부 내에서 도전적인 발언을 일삼아놨던 「엔릴레」국방장관을 제거함으로써 「아키노」 대통령은 앞으로 정국을 더 자신 있게 이끌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아키노」 대통령이 보인 이 같은 결단력으로 봐 앞으로「마르코스」지지자들의 도전, 공산세력과의 협상 등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군부의 일부가 이번에 보인 반 「아키노」노선은 「아키노」 대통령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보여온 느슨한 정책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게 할 것 같다.
또 「엔릴레」 국방장관의 해임은 이루어졌지만 군부 내에 남아있는 그 추종세력을 어떻게 무마하느냐가 「아키노」대통령으로서 시급히 해결해야될 과제다.
「엔릴레」를 정점으로 했던 일부 우익군부세력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마르코스」 지지자들과 손을 잡고 반공시위를 주도해왔었다.
이들이 군부내에서 설자리가 마련되지 않고 이들의 불만이 「아키노」 정부에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반정부세력으로 등장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
이번 군부 일부의 쿠데타음모를 사전에 봉쇄하는데는「라모스」 군 참모총장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점에서 필리핀 군부는 이제 「라모스」를 중심으로 새로운 체제를 구축할 것 같다.
「아키노」 대통령은「엔릴레」국방장관 해임직후 2∼3명의 각료해임이 곧 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것은 곧 군부의 요구사항 중 일부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라모스」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요구하는 것과 같은 대통령선거를 실시하는 문제와 현재의 각료 중 좌익계각료를 해임하는 것 등은 「아키논 대통령으로서는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대통령선거실시는 이미 11월초 마무리되고 내년 2월2일 국민투표에 부쳐질 신 헌법안에 배제된 사항이기 때문에 군부요구대로 선거를 새로 실시한다면 새로운 정치쟁점으로 부각될 가능성이 크다.
또 군부의 계속된 요구사항중의 하나인 「조커·아로요」대통령비서실장, 「피멘틀」 지방장관, 「산체스」 노동장관등 좌익계각료의 해임은 이들이「아키노」대통령의 측근들로 현 체제를 이끌어 가는 중심인물들이기 때문에 「아키노」대통령으로서는 선뜻 결정하기 어려운 사항이다.
결국 「아키노」대통령은 이 같은 군부의 요구사항을 군부와 마찰을 피해가며 어떻게 해결해나가느냐 하는 것이 앞으로 남은 큰 문제점들이다.
더우기 「엔릴레」 해임으로 공산세력과의 휴전협상에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는 되나 협상시한인 11월말까지 휴전협정이 체결되지 못하면 군부의 강경파들이 오히려 역공세를 벌일 명분으로 「엔릴레」 의 해임을 이용할 수 있는 구실을 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아키노」 의 이번 조치는 위험부담을 안고있다.
「아키노」 대통령은 2월 혁명이후 가장 큰 위기를 넘기기는 했으나 군부와의 계속되는 이견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엔릴레」를 제거함으로써 오히려 더 큰 위기를 초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규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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