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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5)여명<제1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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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일행들이 많다면 다 어디로 갔어? 너희들 사는 고장은 어디며 뭐라고 하니?
덕이가 숨도 쉬지 않은 것처럼 한꺼번에 몰아서 두 소년들에게 물었다. 한배는 웃음을 터뜨렸고 우는 혀를 찼다. 우가 먼저 말했다.
우리는 지난번 달이 찼을 때에 고향을 떠났단다. 모두 서른 세 사람이었어. 열 한 사람은 동쪽으로 갔고 또 열 한 사람은 서쪽으로, 그리고 우리들은 북쪽으로 올라왔지. 그러니까 우리 일행은 나머지 아홉 사람이 더 있는 셈이다.
나두 대답을 해야겠지?
한배가 덕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아리강 하루에 사는 조선이란 부족의 사람들이야. 우리 밝 족은 환웅님 이래로 두 손의 모든 손가락만큼 나뉘어서 살고 있거든 .너희들 동북쪽 사람들을 청구라고 부르지. 우리가 살고 있는 근처에는 양이·양주 족이 있고 서북으로 진번 족과 임둔 족이 있다. 그밖에도 예족과 맥족 숙신족 등도 모두 우리와 같은 밝 족이란다. 동북으로는 유족과 너희 청구가 살고 또 그 동으로는 고죽족이 있단다. 옥저 역시 우리와 같은 종족이지. 그리고 저 넘어 산맥 기슭의 초원에는 동호와 산융같은 사나운 부족들이 산다.
덕이는 생전 처음 듣는 사실들이어서 그 많은 부족들의 이름을 되뇌일 수가 없었다. 다만 그는 한부리 노인에게서 자신들의 종족인 밝 족이 여러 갈래가 있고 그들이 사는 고장은 광활한 천지에 퍼져 있다는 것만 배워서 알뿐이었다. 덕이가 물었다.
너희들은 어떻게 그런 모든 고장을 다 아니?
우가 말했다.
한배는 내 벗이지만 우리와는 좀 다른 사람이다. 이 사람은 조선 족 검의 아드님이다.
검이란 뭐냐? 우리 아버지도 갈래 마을과 부근 다섯 마을의 우두머리인데 그와 같은 뜻이냐?
모든 우두머리가 모여 의논을 하여 가려 뽑은 이가 검이시다. 그래서 한배는 이 세상 부족들의 일과 하늘과 땅의 이치를 배웠지. 지금 우리가사는 아리강을 건너 서남쪽으로 나아가면 하수라는 큰 물이 나온다. 그곳 북과 남에 걸쳐서 우리만큼 개명되고 힘센 종족이 이미 큰 나라를 세웠고 오래 전부터 우리 환웅족과 다투어왔다. 서쪽과 북에는 말 탄 사나운 부족들이 우리를 엿보고 서남쪽에는 강대한 나라가 일어나고 있으나 우리 밝 족은 이렇게 사방으로 흩어져서 서로 다르게 살고 내왕도 없이 지내온 지 수백 년이 지났다.
우는 가느다란 눈을 빛내며 말했고 한배가 다시 말했다.
우리도 이렇게 제 각기 나뉘어 살 것이 아니라 힘을 합쳐야 한다. 모두들 제 고장이 아늑하고 평화롭다고 전처럼 상관않고 살다가는 드디어 야금야금 먹혀버리고 말거야. 우리도 모든 부족들이 합쳐서 하나가 되어야한다.
한배는 나직하지만 힘있게 말했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에 한배는 두 손을 모아 꼭 그러쥐었고 그 손을 한참이나 풀지 않았다.
우리들 젊은 전사들은 한님의 아들들이며 환웅 족의 자손으로 선비를 이루어야만 한다.
한배의 말에 덕이는 또 한 번 어리둥절해졌다.
선비가 뭐야?
선비란 저 까마득한 옛날부터 우리가 무리를 지어 낙토를 찾아 이리 저리 헤매던 때에 앞길을 선도하기도 하고 외적으로부터 부족을 방어하기도 하고 ,그리고 조상의 얼을 지켜 나가던 젊은 전사들의 무리를 선비라고 일컬었다. 이는 활 쏘고 칼쓰고 창 던지는 싸움뿐만 아니라 하늘의 가르침을 땅에 이루는 참 사람의 무리를 말한다. 선비가 되려면 몸과 마음이 굳건하고 무엇보다도 하늘의 깊은 뜻을 얼 속에 새기기 위해 심신을 수련해야 된다. 선비는 부족의 삶과 정신을 지키는 무리이다.
한배의 말은 이상한 힘이 있었고 뭔가 덕이의 마음을 건드리면서 그 목소리가 되풀이되어 머리 속에서 울려오는 것만 같았다.
자아, 고기가 다 익었군. 하늘 얘기는 이젠 그만하고 먹기루 하자.
우가 동검을 빼어 다리 쪽을 뭉텅 베어서 덕이에게 내밀었다.
고맙다.
고맙긴, 이건 우리가 함께 잡은 노루야.
우는 다시 고기를 베어 한배에게 주었고 저도 부지런히 먹기 시작했다.
우리는 선비의 수련을 하러 집을 떠났다. 가을에는 돌아가게 될 거야.
덕이는 한배의 말에 놀랐다. 뭐, 가을까지 그럼 앞으로도 몇 달이나 차야 되잖아.
우리는 아마 거의 모든 밝 족의 영역들을 두루 돌아다니게 될 거야. 아마도 너희 청구 족의 고장에도 가게 될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갔어? 열 한 사람이 이쪽으로 왔다면서.
우가 말했다.
지금 이 근처에 흩어져 있을 거야. 우리는 이 곳에서 산맥의 기슭에까지 무엇이 살고 어떤 지형인가를 알아 두려는 거야.
그들은 다시 먼 세상의 일들을 얘기했고 덕이는 숨을 죽이고 그들의 말을 들었다. 그들의 얘기는 모두가 신기하기만 했다.
구리라는 이상한 돌에 관해서도 들었고 갈옷이나 털옷 대신에 삼이라고 하는 풀에서 나온다는 부드럽고 억센 실이나, 누에라는 벌레가 만든 실로 짓는 따뜻하고 질긴 옷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들은 덕이처럼 긴 머리를 그냥 질끈 동인 게 아니라, 머리를 빗어 올려 작은 매듭을 꼭대기에 얹은 간편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꽃봉오리 모양의 건을 썼다. 덕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두 아리강 하류에 있다는 너희 조선에 가보고 싶어.
그래 언제든 찾아오렴. 열 번째의 달이 차면 우리는 언제나 큰 잔치를 벌여 하늘에 제를 지낸다. 인근 사방에서 젊은 선비들이 모여들지.
열번 째의 달?
우리는 상달이라구 부른다. 세 소년들의 얘기는 끝이 없었다. 그들은 배불리 먹고 바위의 처마 밑에서 아주 아늑하게 하룻밤을 지냈다.
시끄러운 새 소리에 덕이가 눈을 뜨니 모닥불은 모두 사그라졌고 아침 안개가 물가에 엷게 깔려 있었다. 덕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배는 벌써 일어났는지 보이지 않았고 우는 옆으로 누워 다리를 잔뜩 꼬부리고 잠들어 있었다. 덕이는 조용히 일어났다. 덕이는 아래로 내러갔다 .물가의 바위에 앉은 한배의 등이 보였다. 덕이가 가까이 다가서자 한배가 웃으면서 그를 돌아 보았다.
잘 잤니?
응, 일찍 일어났구나. 너희는 오늘 어디로 갈 거야.
한배는 손가락으로 계곡의 저쪽 끝을 가리켰다.
저 낮은 산 사이를 지나면 초원이 나온다. 거기서 벗들을 만나기로 했어. 너는 어디로 갈 테냐.
덕이도 한배와 나란히 바위에 앉았다.
나도 거기까지 가서 산맥 기슭에까지 들어가려고 해.
그럼 같이 가자.
덕이는 한배에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몹시 기뻤다. 덕이는 이제 하루 저녁 같이 지냈던 사이였지만 한배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바위 밑으로 돌아가니 우가 일어나 불을 피워 마른 떡을 굽고 있었다.
세 소년은 안개를 헤치고 강변을 따라서 올라갔다. 말랐던 내는 위로 오를수록 가늘게 되어가더니 제법 흐르는 물로 바뀌어 갔고 나무도 많아졌다. 그들은 말을 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달려갔다.
해가 중천에 걸릴 때쯤에 세 사람은 낮은 산이 연이어진 계곡을 빠져나갔다. 갑자기 시야가 확 터지더니 푸르스름하게 보였던 높은 산들이 끝간데 없이 펼쳐진 너른 풀밭의 맞은 편 쪽에 주춤 주춤 서 있었다.
세 사람은 계곡 어귀에서 한배의 일행들을 기다렸다. 그러나 저녁때까지도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하는 수 없이 세 소년은 거기서 하룻밤을 새우기로 했다. 우가 활을 쏘아 잿빛 털의 토끼 한 마리를 잡아왔다. 불을 피우고 잠자리를 마련하려던 참인데 덕이가 일렀다.
가만있어.
한배와 우는 긴장한 덕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기, 누군가가 있다.
덕이가 초원 멀리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 위로 오르고 있는 실낱같은 연기를 가리켰다. 덕이는 한참이나 그 쪽을 살폈다.
저건 작은 모닥불이 아니야. 우리 벗들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그 쪽으로 출발하자. 다 모여 있는 모양이지.
우는 벌써 땅에 풀어놓았던 안장을 말 등에 얹고 있었다. 그들은 연기가 오르는 곳을 바라고 초원을 질러 갔다. 그러나 보기보다는 제법 먼 거리였는지 어느덧 주위가 캄캄해졌다. 불똥이 오르고 있는 것이 보일 정도의 거리에까지 다가갔을 때에 덕이가 말을 세우면서 물었다.
잠깐, 너희 일행들이 양을 데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무슨 소리야 ,양이라니.
양의 울음소리를 들었어. 덕이와 우가 주고받는 말을 듣더니 한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동호족의 고장이다. 그들의 변경인 셈이지. 조심해야 한다.
덕이가 말에서 내리더니 당에다 귀를 들이고 찰싹 엎드렸다.
틀림없어. 너희들 벗들이 아니야. 저것은 초원 부족들의 숙영지야.
소년들은 위험을 느끼고 모두 말에서 내렸다. 한배가 말했다.
그러나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 살펴봐야 해. 혹시 우리 일행이 저 사람들에게 해를 당했는지도 몰라.
여긴 위험해. 아까 그 계곡 어귀로 돌아가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자. 그들은 이동 할테니까 그때에 우리가 분명히 살펴볼수가 있을거야.
우가 말했다.
한배 말대로 우리 벗들이 해를 당했거나 붙잡혔다면 지금같은 밤이 훨씬 낫다. 보고 가야해
좋아, 그럼 여기서 말을 세워 두고 두 사람만 가보자. 덕이 너는 여기서 말을 지키구 있어. 우리가 곧 다녀올테니까.
덕이는 한배를 발렸다.
아니야, 네가 말을 지키렴. 나하구 우가 갔다 올거야.
우리 부족의 전사들이야. 마땅히 내가 가야하고 너는 얼굴도 모르잖아.
알겠어. 내가 말을 보겠어.
한배와 우는 덕이를 남겨두고 몸을 낮추어서 불빛을 향하여 뛰어갔다.
얼마 못 가서 말의 울음소리에 섞여 양이 서로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풀밭이 털가죽 같이 밀집한 곳에 숙영지가 있었다. 십여 채의 막사가 보였다. 친척끼리 이동하는 작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장정들을 헤아려 본다면 대략 스무 명은 넘을 것 같았다. 한배와 우는 불빛을 바라고 엎드려서 기어갔다 .동호족 사내들이 보였다. 그들은 털가죽을 두르고 다리에도 가죽을 감쌌다. 기름을 전신에 바른다더니 과연 불빛에 드러난 그들의 건강한 어깨와 팔이 번들거렸다. 그들은 저녁을 먹는 중인지 불가에 둥글게 모여서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계속해서 떠
들고 있었다. 아이들과 부녀자들은 좀 떨어져서 저희끼리 먹고 있었다. 우가 한배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저길 봐,우리 벗들이야.
그들의 일행 두 사람이 사내들 뒤편 어둠 속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어떻게 하지?
기다려 보자. 먹고 나서 잠들겠지.
그러면 한참 더 있어야 한다. 저것들은 곧장 잠들 것 같지 않은데.
유목 부족들의 막사는 가운데에 기둥을 세우고 주위에 둥그렇게 기둥을 세워 한 묶음으로 모으고 그 외에 가죽을 씌운 것들이었다. 한배가 다시 속삭였다.
물러가서 기다렸다가 조용해지면 다시 돌아오자.
그게 좋겠어.
하지만 두 소년은 숙영지의 유목 부족이 망보는 전사를 어떤 방식으로 세워 두는지 알지 못하였다. 대개 숙영지 근처에 높은 곳이 있으면 거기에 한 눈에 먼 외방과 자신들의 야영 터를 관할할 수 있는 곳에 망보기를 세우고 외적이 침입할 만한 곳에는 잠복초를 묻어 두는 법이었다. 한배와 우는 그들이 기어서 접근해 왔던 때부터 줄곧 잠복초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이 돌아서서 엉거주춤 상반신을 숙이고 달리는데 무엇인가가 한배를 향하여 쌩 하니 날아왔다. 그것은 짧은 가죽끈의 양 끝에 돌을 매단 팔매였고 유목 부족들이 활과 창을 말 위에서 잘 쓰듯 팔매는 새끼 가축을 잡을 때 쓰는 물건이었다. 팔매는 한배의 두 다리를 휘감았고 그는 두 발이 얽혀서 넘어졌다. 한배가 어이쿠 하는 소리를 지르며 쓰러지자 우가 달아나다 말고 돌아서서 칼을 빼들고 뛰어들었다. 복초는 둘이었는데 그들은 벌판에서 단련된 건강한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기다릴 것도 없이 창대를 엇갈려 우의 다리 사이를 훑었고 우는 보기좋게 궁둥방아를 찧고 나뒹굴었다. 두 소년은 창날에 등과 배가 눌린 채로 할딱거리며 땅에 넘어져 있었다. 이 작은 소동을 보고 다른 장정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억센 목소리로 말을 주고받더니 두 소년을 우악스럽게 일으켜 세워 불가의 사람들에게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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