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풍경·역사·사람 얘기까지…민정기의 ‘현대판 진경산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기사 이미지

민정기 작 ‘홍제동 옛길’, 캔버스에 유채, 116.8×273㎝ 2016. [사진 금호미술관]

이 시대에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는 많다. 춘하추동 자연 풍광을 그럴듯하게 화폭에 담아 들이미는 풍경화가들 속에서 민정기(67)씨는 다른 시선, 다른 내용으로 여타 화가와 구분된다.

금호미술관서 풍경화 30점 전시
임진나루부터 신설동 골목까지
현장답사로 그린 도시 풍경
장쾌한 산수, 호랑이 설화도 중첩

그에게 풍경화는 역사와 인간을 다시 보는 창(窓)이다. 이 땅에 스며든 사람들 이야기가 그의 풍경화에서는 색채와 형태로 배어나온다. 지리학 정보, 인문학 견해, 일종의 민중사관까지 그의 풍경화는 중첩된 시대정신으로 기름지다. 한 폭의 캔버스는 수십 권 책과 지도와 풍물지를 품고 있다. 40년 이상 고집과 끈기로 일궈낸 ‘민정기판 도시 풍경화’는 조선시대 겸재(謙齋) 정선이 구현했던 진경산수의 현대판처럼 보인다.

지난 13일 서울 삼청로 금호미술관에서 개막한 ‘민정기’전은 죽어라고 그림만 그리는 전업 작가의 삶이 얼마나 치열할 수 있는가를 입증했다. 옛 그림과 판화 몇 점을 빼고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전시장을 채운 30여 점의 대형 풍경화는 모두 몇 년 새 수십 차례 현장 답사로 일군 근작이다.

기사 이미지

‘유 몽유도원도’의 중심부인 폭포를 가리키며 화가는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이 땅을꿰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 정재숙 기자]

작가는 “이번 신작들은 도시를 그리기 위한 시도”라고 했다. 고려 때부터 만들어졌다는 신설동 쪽 길을 수십 번 걸으며 그동안 사라지고 변화된 것들을 생각했다는 식이다. 그는 그런 시대의 축적을 관찰해 그림에 차곡차곡 담아내고 흡수시키는 일이 흥미롭다고 했다.

“현재 북쪽으로 우리가 갈 수 있는 최북단 임진나루부터 시작했죠. 개성으로 부르는 개경에서 현재 서울인 남경으로 오는 길의 절반은 우리가 걸을 수 없는 길입니다. 분단의 현실이 풍경화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죠. 모든 답사에 도시학자인 최종현 전 한양대 교수가 동행하며 시각을 보완해줬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바탕으로 21세기 서울의 도심을 접목한 ‘유(遊) 몽유도원도’는 장쾌한 산수를 즐기면서 도시의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게 만든다. 화폭 좌우에 연극무대의 장막을 친 듯 꾸민 ‘묵안리 장수대’는 전설로 내려오는 호랑이 설화를 중첩시켜 자연과 어우러진 전통 공간의 내력을 이야기그림처럼 들려준다.

미술평론가 최민씨는 민정기의 새로운 풍경화에 대해 “지리학적 정보를 풍경화라는 회화적 형식 속에 포함시키고자 은근히 욕망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묻는다. 일종의 ‘지도 그리기’인 그의 풍경화에는 “보는 것과 아는 것, 즉 지각적 체험의 차원과 지적 정보 제공의 차원이 한데 결합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정기 풍경화의 핵심은 유목민과 같은 자유로운 이동에서 얻는 ‘시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텁고 무겁던 유화의 붓질이 투명하고 옅은 수채 물감의 발림처럼 가볍고 경쾌해진 것은 그의 시선이 그만큼 내면의 자족과 기쁨을 찾았다는 표현일까.

전시 연계 프로그램 ‘잊혀진 경물을 찾아서’가 11월 5일 오후 2시부터 민정기 작가와 도시학자 최종현씨 동행 답사로 이어진다. 전시는 11월 13일까지. 02-720-5114.

글, 사진=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