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의 항아리 강석경<작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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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제 시내에 나갔다가 골목으로 들어오는 승용차의 덮개에 노란 은행잎이 쌓여있는 것을 보고 애들처럼 좋아했다.
가로수 밑에 대기하고 있었던 차였나보다. 그 풍경에 더 즐거워한 쪽은 후배여서 나는 차마다 은행잎을 일부러 뿌리고 다녀도 좋겠다 하고 슬금 웃었다.
차가 낙엽을 몰고 다닐만큼 가을이 깊었다 .벌써 11월.
그런데 나는 이제야 계절을 느낀듯해서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온종일 직장에 매달려사는 월급장이도 아니고 시간을 잊을만큼 일에 몰두해있는 것도 아니면서 자연의 변화에 무감각했다니.
보름전 산사에 묵었던 일이 생각난다. 수려한 산이 아니라 근교에 나가면 흔히 볼수 있는 야트막한 둔덕에 싸여있는 농가같은 곳이었다.
사람발길이 묻어있는 그 소박한 풍경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어서 잡일에 시달리지 않고 즐겁게 일할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곳에 열흘 남짓 머물면서 나는 갈때와는 또다른 갈등을 안고 나왔다.
매일 숲을 거닐며 습습한 낙엽 냄새를 묻히고 다녀도 별다른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창을 열면 파도처럼 다가오는 황록의 단풍도, 밤마다 혼들처럼 떠올라 더이상 투명할수 없이 빛나는 별들도 내게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다.
마음이 번잡할 때면 늘 도망치듯 도시를 떠나 자연에게서 위로를 받았고 길섶의 풀꽃 하나에 생명의 아름다움을 깨닫곤 했는데. 하찮은 갈등이나 미움으로 늘 내 언저리를 돌다가 나의 「인간」을 되찾고 사물의 심중에 다가설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자연이 내게 흔한 풍경에 불과했다.
뿐아니라 책상앞에 앉아서도 일을 못하고 좇기는 사람처럼 서성거리기만 했다.
자신이 왜 그토록 고갈되었는지 한 친구에게 상담하듯 덜어놓기 전엔 그저 스트레스의 축적이라고만 생각했다. 친구는 가물때의 우물을 비유로 들었는데 『밑바닥은 요만한데 자꾸 퍼내면 우물물이 뒤집혀서 흙망물이 된다』고 적절하게 표현했다.
그 비유에 어디 나만 공감하랴. 인생에는 냇물처럼 흘러가는 부분도 많지만 누구에게나 물독처럼 괴는 부분이 있다. 그것을 항아리라 한다면 그 항아리가 깊고 그윽할수록 하늘도, 나뭇가지도, 흘러가는 구름도 비킨다.
가슴의 항아리란 각자의 내밀한 방이며 진실이기도 하고 자연일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항아리가 맑고 깊어져서 사람들이 가끔 자기 얼굴이나 비춰보고 가길 원하지만 어디론지 미친말처럼 달리고 있는 사회가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꾸만 휘젓는다.
남의 항아리야 어떻건 내게 필요하면 서슴지않고 퍼가려 하고 휘둘러놓고 위로의 이름으로 긁어놓기도 한다.
성숙한 사회, 사람다운 사회란 개인부터 각자 가슴의 항아리를 잘 지키도록 아껴줄 수 있는 사회가 아닐까.
산에서 나온날 지하철에서 스캔들에 휘말렸던 한 여배우의 약혼자 사생활까지 들먹인 여성지 광고를 보고 씁쓸하게도 자연보호 팻말을 떠올렸다. 나무의 가슴에 애달프게 달린「나를 아껴주세요」란 팻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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