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다운 정치 좀 합시다|송진혁(정치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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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요즘 우리 정치 현실은 오래 전에 읽은 무협 소설의 한 글귀를 떠올리게 한다.
천무삼일청 지무이리평이란 글귀인데 하늘은 3일 맑은 날이 없고 당은 3리 평평한 곳이 없다는 이 말처럼 우리 정치 상황은 요즘 하루 편한 날이 드물고 한가지 잘 풀리는 일이 없는 것 같다.
국회는 열리기만 하면 시끄러운 일만 만들어내고 현역 의원이 구속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는가 하면 학원에서는 북괴 주장을 담은 대자보가 나오더니 급기야는 건대 사태까지 터지고말았다. 북한의 금강산댐에 대한 당국의 발표도 국민을 불안케 한다.
이런 가운데 위기설이니 조치설이니 하는 「설」은 또 얼마나 꼬리를 무는지 사회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고있다.
정국은 여야가 두던 바둑을 팽개친 격으로 진전 없이 막혀있고 여야모두 소리 높여 외치던 합의 개헌은 점점 암울한 전망만 낳고 있을 뿐이다.
시국이 이렇듯 뒤숭숭하고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저미하고 있는데도 책임을 느끼고 돌파구를 열어야 할 「정치」는 찾아볼 길이 없다.
학원에 북괴 구호가 등장하고 무려 1천2백74명의 대학생 구속이라는 전대 미문의 엄청난 일이 터졌는데도 여야의 대응이란 것은 지극히 표피적인 수준을 맴돌았을 뿐이다. 야당은 조사반이다, 면담반이다 하여 학교로 경찰서로 뛰어다녔고 여당에서는 배후규명을 철저히 하라, 유언비어를 발본하라는 식으로 수사독려나 했던 형편이다.
또 문교부나 대학 당국도 기껏 처벌 문제나 논의하고 사태가 번지면 휴업·휴교도 불사한다고만 했을 뿐 이런 엄청난 일을 맞고도 교육적·교육 정책적 책임의식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좌경 용공은 물론 막아야 하고 북괴 동조나 친공은 법에 따라 엄단돼야 한다. 그 숫자가 많다고 경벌하거나 숫자가 적다고 마음놓고 중벌하거나 할 일이 아닌 것도 확실하다. 이런 일은 정책의지나 흥분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지극히 침통하고 비감한 심정으로 다뤄야 할 성질이다.
그리고 문제의 본질이 고도의 정치적 성격을 띠는 만큼 정당은 정당대로, 당국은 당국대로 왜 이런 일이 벌어졌으며,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는지, 반성할 일과 책임질 일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이 사건을 보는 내외의 눈들이 가장 납득하고 안도 할만한 처리방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과연 이런 진지한 자세와 노력이 있는가.
문제는 심각한데도 문제를 풀어 보려는 정치다운 정치가 없다는 느낌이다.
여권은 혹시 최근의 무거운 분위기가 야당을 위축시키고 다소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있다고 내심 형세 유리라고 판단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무거운 분위기 속에 얻어지는 소강이란 것은 그야말로 일시적 현상일 뿐 본질적 개선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오히려 최근 상황을 눈여겨보면 한 때 활발해 보이던 민정당의 역할은 다시 왜소해지고 공권력만 전면에 부각되는 인상이다. 여권에서 정치는 줄고 행정은 커졌다는 얘기다.
야당도 정치를 안 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좌경 용공 문제가 부상하자 야당의 모습은 눈에 띄게 위축되고 위상 정립을 제대로 못한 채 「한기」부터 피하고 보자는 자세로 보인다.
신민당도 이제는 명백히 자기 입장을 세워야 할 것 같다. 2·12총선 이후 지고있는 재야·운동권에 대한 빚도 빚이지만 현실정치의 제1야당으로서 합의개헌을 목표로 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민주화와 좌경 용공을 구별하는 한선을 그어야할 단계가 온 듯하다. 이민우 총재와 두 김씨가 건대 농성 사태를 우려하면서 학생자제를 촉구하지 않았다는 민정당의 비난은 보수 반공 정당인 이상 아프게 들어야할 대목이었다.
오늘의 이 어려운 상황을 풀어나가는 길은 결국 여야의 정치력 복원뿐이다.
민정당은 여권 내에서 자기 위치를 확보하고 이제는 국민이 다 납득할만하게 임기말에 대비한 내부의 이행 절차와 계획을 객관화해야 한다.
신민당도 자기의 좌표 정립과 당내 질서를 개선한 바탕위에 이 중대한 정국에 임해야 한다. 한 쪽이 나가자면 다른 쪽이 끌어당기는 식의 풍토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이처럼 스스로를 정비하는 노력과 함께 무조건 헌특을 정상화하고 각종 대화채널을 모조리 가동시키는 것이 좋겠다. 기왕에 서로가 요구한 사항이나 조건은 모두 백지로 돌리고 다시 헌특에 복귀하고 총무회담·대표회담도 하고 나아가 영수회담도 하는 것이 좋겠다. 난국을 풀어나가는데 하늘아래 다른 묘수가 없을 것 같다. 헌특을 정상화하고 대화를 하는 그 자체로 긴박감의 수위도 내려가고 유언비어는 줄고 정부·여·야 모두 다소나마 여유가 생길 것이다.
다음으로 헌특 시한을 연장하는 것이 좋겠다. 정기 국회 회기 말 또는 연말로 잡은 헌특 시한은 이제 너무 촉박하다. 이미 여야 양쪽에서 연기 불가피론이 나오고 있지만,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말고 여유 있게 연기하는 것이 정국 완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은 피차 「험한 말」을 삼가라는 것이다. 정치에 있어 말은 상대방을 납득시키고 따라오게 하자는 것이지 자극하고 화나게 하자는 것은 아니다.
요즘 보면 불필요하게 「험한 말」을 많이 쓰는 경향이고 대소의 설화가 끊이지 않고 있다. 점잖은 지도층들이 차마 해서는 안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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