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벌」만으로 다 해결될까|금창태(편집국장 대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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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건국대 점거 농성 사건은 여러모로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
우선 농성 학생들이 6·25를 반미 민족 해방 투쟁이라고 주장했으며 북괴의 가극 『피바다』의 대사를 거침없이 인용했다니 그들의 용공적 구호와 언동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이번 농성사건을 수사중인 검찰당국자는 사건 주동자들을 「공산 혁명 분자」 로 지칭할만큼 극단적 성향이 깊어졌다고 밝히고있어 놀라움을 더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다. 이번 사건으로 구속될 학생이 무려 1천2백74명으로 단일사건으로는 사상최대의 기록이다.
검찰수사의 구체적 내용을 모르는 국민들의 입장에서 이렇게 많은 학생들을 한꺼번에 구속해야만 하는가하는 문제, 다시 말해 국가 형벌권 행사의 타당성 여부는 무엇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은 그 많은 숫자에 또 한번 놀라고 있다.
학생들의 좌경·용공행위 자체는 용납 할 수 없지만 그렇다하더라도 그 많은 학생들을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가 하는데는 이견의 여지가 많다는 표정들이다.
물론 무더기로 연행된 학생들을 짧은 시간에 옥석을 가릴 수 없어 대량구속이 불가피하다는 수사당국의 고충도 이해는 간다. 따라서 풀어놓으면 달아나거나 증거를 인멸할 것이 뻔한데 불구속 수사를 하라고 요구한다면 그것도 무책임한 말이 될 것이다.
문제는 이번과 같은 무더기 연행·무더기 구속이라는 엄벌주의가 급진 좌경에 휘말린 학원사태를 풀어나가고 재발을 막는데 얼마만큼 도움이 되느냐하는 것이다.
오늘날 학원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고 갈수록 폭력 양상이 확대되는 것이 형사처벌이 약했기 때문이라고만 볼 수 없다.
만약 미온적 처벌이 학원 사태를 악화시킨 원인이라면 해결방법은 간단하다. 강하게만 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볼 때 공권력의 진압 능력이 강화되면 학생들의 폭력적 운동도 그에 맞서 격화돼왔다. 학생들의 증폭된 폭력은 또 다시 공권력의 강화를 부르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학생들의 용공·좌경화 현상은 이념 서적을 통해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저변에 그같은 싹이 자랄 수 있는 온상이 있었다고 보아야한다.
때문에 이러한 온상을 제거하려는 노력 없이는 근본적 치유가 어렵고, 정부의 강경책이 오히려 운동권의 또 다른 강경 대응을 몰고 올 수도 있다고 보아야한다.
물론 운동권 학생들의 배후에 숨어있을 불순세력을 뿌리 뽑으려는 당국의 각오와 의지가 전에 없이 단호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불순 세력은 우리의 존립을 위해서 기어코 발본색원되어야 한다.
그럴수록 처벌 대상 학생의 결정이나 법률 적용에는 신중을 기해야한다.
특히 국가 보안법과 같은 주요 사안에 대해서는 형사법이 요구하는 절차의 정당성이 엄격히 지켜져야 한다.
정책적 판단에 의해 법 적용이 좌우되거나 수사의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앞질러 「좌경」이니 「용공」이니 하는 예단이 끼어 들어 사회적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만의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물론 운동권 학생들의 구호가 그렇고 유인물과 행동양상이 북괴의 주의주장과 일치하고 있어 짐작이 가고도 남을 만 하지만 그렇다고 연행 학생 대부분을 도매금으로 몰고가는 위험성은 배제해야한다.
TV에서 「용공」「좌경」할 때마다 학생들의 시위 장면을 비추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문제다.
당국이 말하는 대로 우리의 학원이, 그리고 노동 현장과·재야 일부에 용공세력이 그토록 만연됐다면 그것은 우리체제의 심한 자가 당착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이는 바로 우리가 신봉하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해 보이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기성세대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특히 정치인이 정치를 잘 못했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볼 때 무더기 연행·무더기 구속의 충격 요법이 반드시 온당하다고만 보기 어렵다.
형사법상 구속은 증거 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있는 경우를 요건으로 하고있다.
무더기로 구속되는 사건에 있어 모든 해당자들이 이 같은 요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는 없다.
또 구속은 공판진행과 형 집행의 확보를 위한 수단인데 구속된 사람 모두가 앞으로 구속기소돼 실형을 선고받으리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제까지 학생사건의 경우 상당수가 기소유예로 석방됐고 법원에서 집행 유예로 풀려난 경우도 많았다.
지난해 민정당 중앙 정치 연수원 농성 사건의 경우 1백93명의 구속자중 기소는 81명에 불과했다. 지난 2월 서울대 연합 시위 사건 때도 2백25명이 구속됐으나 기소된 학생은 87명뿐이었다. 결과적으로 구속할 필요가 없는 학생까지도 수사의 편의를 위해 구속한 셈이다.
이 같은 현상이 거듭된다면 「구속」자체를 가볍게 여겨 인신 구속의 경시풍조가 생길 우려가 있고 검찰의 기소 독점·편의주의에 대한 불신을 낳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구속 영장을 발부한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 저하될 것이다.
대량 구속은 또 숫자가 많아서 법이 정한 48시간내 영장 청구가 현실적으로 어려워진다.이번 건대 농성 학생들도 연행 81∼1백44시간이 지나서부터 영장이 청구됐다.
법을 세우기 위한 구속이 법의 명문규정인 48시간 제한을 스스로 어긴 것이다. 이래 가지고서는 국가 공권력에 대한 권위가 설 수 없다.
용공수사도 정당한 절차를 준수할 때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나타낼 수 있고 국민적 신뢰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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