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느껴 매일 숙소 바꾼다|필리핀 납치 현장 파살렝에서 박병석 특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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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필리핀에서의 한국인 납치사건을 취재하고 있는 박병석 특파원은 지난 1일 세 번째로 납치 현장인 정글 속의 한일개발 현장 사무소를 찾았다. 다음은 박 특파원의 현장 취재기다.
정글 속의 밤은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다.
한일 개발 직원 피랍 사건 이후 세 번째로 방기(라오악에서 북쪽으로 70km)에 위치한 한일 개발 캠프 2를 찾은 1일 밤은 태풍 직후의 잔뜩 찌푸린 날씨에 무거운 정적만이 감싸돈다.
이따금 후루룩 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캠프에 오는 도중에서 목격했던 구렁이 소리 같아 불안감이 염습한다.
1일 밤은 아예 한일 개발에서 직원들과 함께 밤을 지새기로 작정했다.
라오악시에서 인질석방 작업을 지휘하고있는 한일개발 이강목 상무는 기자에게 『나 자신 신변이 불안해 매일매일 거처를 바꾸고 있으며 앞으로는 경호원을 붙여야할 정도로 위험을 느낀다. 당신의 안전도 마찬가지이니 마닐라로 돌아가라』고 간청했다.
기자는 『나도 이곳으로 오기 전 마닐라에서 사망 보험 (여행자보험)을 들고 왔다. 입장은 마찬가지다』고 맞섰으나 라오악시에서 가장 좋다는 안로칸자 호텔 주변에도 총을 든 경호원 10여명이 24시간 순찰을 하고있다.
1일 하오 어둑어둑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 라오악시를 출발한 버스는 태풍으로 엉망이 된 길을 두시간쯤 달린 8시쯤 한일개발 캠프 2부근에 도착했다. 도중 지난 1,2차 방문 때와는 달리 군 검문소의 검문이 강화되고 총을 든 민간인들도 곳곳에 눈에 띈다.
현지의 한 군 관계자는 한국인 2명이 피랍되기 며칠 전 한일개발 캠프 4부근에서 정부군과 NPA사이에 전투가 발생해 10여명이 사망한데 이어 이틀 전에도 NPA가 군 봉급 수송차량을 습격, 양측에서 4명이 사망했다고 귀띔했다.
추수기를 맞아 주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려는 NPA활동이 부쩍 잦아지고 있다는 얘기들이다.
일부에서는 NPA측이 추수기에 주민들로부터 세금을 모두 걷을 때까지 한국인 2명을 인질로 확보, 정부군의 토벌작전을 지연시키도록 할 생각인 것 같다고 추측하고 있다.
캠프2 한일개발 임시 숙소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조보희(심)소장도 깜짝 놀란다. 돌아갈 수도 없으니 이곳에서 하루 자고 내일아침 떠나라는 조소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한일 개발 직원들과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가 방이 깊어 침대에 누웠다. 옆자리에 누운 박한수씨(50·십장)에게 『왜 아무소식이 없을까요?』 라고 묻자 박씨는 『글쎄요. 1주일 정도면 돌아올 것으로 알았는데 걱정이 됩니다』며 몸을 뒤척였다.
2일 새벽 4시쯤 일어나 숙소 문을 슬그머니 열고 밖으로 나오니 정글 속의 적막이 기자를 압도한다.
5시가 되어 한일개발 직원들이 모두 기상하자 기자는 조 소장에게 『NPA를 만나러 가겠다. 길을 안내할 쑬만한 현지인을 소개해 달라』고 떼를 쓰자 조 소장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조 소장은 『나는 올해로 정글생활 14년째이지만 산동네사람(NPA)을 만나기 위해 산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짐승들이나 무장강도들의 위험은 차치하고라도 산에 들어가려면 NPA는 물론정부군 양쪽의 통행증이 있어야 한다』며 적극 만류한다.
그러나 기자는 피랍 사건 현장인 파살랭 한일개발 캠프4와 그 지역의 촌장 및 NPA와 밀접한 군인들을 만나기로 하고 조 소장이 지프로 동행하기로 했다.
캠프4 현장에 이르는 길은 1주일전 기자가 처음 방문할 때보다 더욱 험했다. 태풍에 길이무너진데다 나무를 엮어만든 다리의 침목이 떨어져나가 조 소장이 운전하는 지프는 2시간30분간의 긴장과 곡예 끝에 현장에 도착했다.
캠프4 피랍현장은 마지막 철거 작업을 하고 있었다.
피랍현장인 직원숙소 퀀세트는 완전히 철수됐고 현지인 숙소의 철거작업이 끝마무리에 와있다.
건물이 철거돼 앞이 터진 북쪽의 남태평양은 눈에 묻어날 정도의 남빛을 더하고 있다.
기자는 사건 지역 촌장 「베네메이트」씨(46)와 이 지역 주먹 대장이라는 L씨 등 정보가 있을만한 사람 5, 6명을 차례로 만났으나 그들도 신통한 소식은 아직 없다고 안타까와했다.
조 소장은 필리핀이 31일부터 3일간 연휴지만 직원들의 동의를 받고 정보 수집을 위해 작업을 계속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다시 찾은 사건 현장은 여전히 적막 속에 휩싸여 있었고 사건 해결은 아직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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