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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규(이대 교수·정치학)|「어른다운 어른」이 아쉽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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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어릴 때의 일이어서 「호걸」할머니의 성이나 이름을 기억할 수 없다. 그저 우리들 조무래기들은 호걸 할머니라고만 불렀다. 젊어서 남편과 사별한 이후 슬하에 아무런 자식도 없이 국밥 집을 열어서 생계를 유지했으며 그러다 보니 성격도 자연히 괄괄해졌던 그러한 할머니였다.
한창 장난이 심하여 때로는 싸움질까지 했던 우리또래의 어린이에게 호걸 할머니는 대단한 위세로 군림했던, 언제나 무서운 할머니였다. 동리에서 고부간에 불화라도 생기게되면 언제나 호걸 할머니는 엄정한 심판자가 되었고 술 먹고 주정이 심한 남정네들에게도 대갈일성의 걸찍한 욕실까지도 서슴지 않으셨던 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호걸 할머니는 언제나 남에게 군림하고 욕이나 하며 어린이들의 머리통을 쥐어박기나 하는 그러한 어른만은 아니었다. 칠칠치못한 개구쟁이들의 코도 곧잘 닦아주셨고 어떤 때는 월사금을 제때 못 냈던 동네 아이들에게 꼬깃꼬깃하게 모아둔 귀한 돈으로 대납해주시기도 했다. 아마도 해방된 그 다음해 여름으로 기억되는데 마을에 전염병 콜레라가 돌아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그때도 웬만한 사람들은 병자 곁에 다가서기 조차 꺼렸지만 호걸 할머니는 죽은 사람의 장례까지도 여자의 몸으로 치르기도 했다.
진실로 「호걸 할머니」라고 불려질 수 있을만한 어른이셨다. 그러다보니 호걸 할머니는 자연히 온 동네의 정신적인 그 어떤 권위 같은 것을 누릴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한 권위는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고임을 받았던 것 같다.
호걸 할머니의 이와 같은 힘, 그것을 권위라고 해도 좋고, 또는 카리스마적인 마력이라고 해도 좋을 그 어떤 것은 도대체 어떻게 하여 형성될 수 있었을까.
할머니의 그 우렁찬 목소리 때문만도 아니었고, 힘센 주먹 때문도 아니었으며, 재산 같은 것이 많아서 그랬던 것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그것은 어른으로서 어른다움을 갖추었기 때문이었으며,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유보 없이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호걸 할머니의 그 권위가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는 한낱 잊혀진 전설처럼 아련하게 가슴을 적셔주고 있다. 어른다움이 오늘의 어른 속에는 얼마나 남아있을까. 아니 그보다도 각자의 직분과 직위에 걸맞은 권위가 책임을 통하여 얼마나 인정받고 있을까.
스물을 이제 갓 넘은 젊은이들이 민족과 역사를 책임진다면서 이 거리 저 모퉁이에서 생경한 구호를 외칠 정도가 되어버린 사회에서 어른들의 권위 같은 것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으며, 말꼬리나 잡고 서로가 격렬하게 비난하는 목소리가·의사당을 메울 때 정치가들의 권위 같은 것은 아무데서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걸핏하면 『발본색원한다』거나 『뿌리 뽑겠다』고 장담했던 고위 관직자들의 약속들도 끝내는 아무런 효험이 없는 한낱 단순한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바로 그분들의 권외는 어디 쯤에 매달려 있는 것일까.
권위를 잃은 어른들은 연민의 대상일 뿐이며, 억지로 권위를 강요하는 행위는 이성의 매몰을 가속시킬 뿐이다. 권위는 오직 합당한 이치를 바탕으로 하여 많은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을 때, 그리고 그 지지가 실천 속에서 단단해지게 될 때 저절로 이룩되는 것이다. 한 때는 권위가 어느 개개인의 특별한 능력이나 힘에 의해서 나타날 수 있다고 믿었던 때도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법이나 제도가 만들어준 결과라고 믿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에서는 권위는 그러한 성격들, 즉 특정인의 카리스마적 기질이나 능력에 의해서 이룩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제 오늘의 사회는 그러한 카리스마를 믿기에는 모두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서로의 능력이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비록 제도나 법에 의하여 얻어진 권위라 해도 현실의 온갖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정당하게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저절로 소멸되고 만다.
오직 권위의 확보는 언제나 거듭되는 창조의 과정이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의 인식의 공감대위에 합의를 얻을 수 있을 때만, 그리고 그러한 합의를 성실하게 실천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기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권위를 잃은 사회가 부딪치게되는 절망은 마치 이념을 상실한 행동의 무모함 그 자체이며 마땅히 권위를 가져야 할 사람 그것을 가지고있지 않거나, 설사 가졌다 해도 정상적으로 행사하지 못한다면 이미 그 사회는 「뿌리뽑힌 자의 삶」의 표류가 중첩되는 혼돈을 보여줄 뿐이다.
진실로 오늘 우리 사회는 권위의 복권이 더없이 요청되는 시점에 놓여있다.
어른다운 어른, 스승다운 스승, 정치가다운 정치가의 존재와 실천이 바로 권위 있는 사회로의 복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권위가 복권된 사회에의 기대는 마치 호걸 할머니의 그 호탕한 목소리가 더없이 아쉽게 느껴지는 갈증의 한 욕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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