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아탈리 칼럼

알레포 신드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기사 이미지

자크 아탈리
아탈리 에 아소시에 대표
플래닛 파이낸스 회장

알레포 폭격 참사를 보며 2011년 이후 시리아인들의 삶이 얼마나 지옥 같았을지 떠올리게 된다. 이들이 처한 비극 속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40만~50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이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다. 화학무기 공격을 비롯해 수많은 학살과 전쟁 범죄, 반(反)인륜 범죄가 자행됐다. 이 와중에 시리아 인구의 절반이 삶의 터전을 잃었고 500만~600만 명의 시리아인, 즉 시리아 인구 4분의 1이 매우 험난한 조건에서 불확실한 운명을 향해 자신의 조국을 버리고 떠났다.

알레포의 비극은 통념을 부숴
새로운 불균형 현상 이해하고
세속주의 원칙 국가들 지원해야
하나 된 강한 유럽의 도움 절실

하루가 멀다 하고 타전되는 알레포의 참상이 날이 갈수록 더 끔찍한 모습으로 변하면서 지정학 전문가들이 20년 전부터 반복해 읊었던 통념이 산산조각 나고 있다. 냉전 이후 우리가 믿었던 확실성이라는 것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알레포는 증명해 보인다.

당시 가장 먼저 나왔던 이야기는 두 강대국, 즉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는 더 이상 맞서 싸울 이유가 없으며 이제 그들은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경제적 경쟁 속에서 전 세계의 복지를 위해 일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두 나라는 시리아의 머리 위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 있다. 아직까지 둘 사이에 교전이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전문가들은 또 이렇게 단언했었다. 현재의 비정부기구들에는 모든 상황에 개입할 수 있는 힘이 있고, 모든 국가에 비정부기구의 규정을 강제할 수 있다고. 하지만 알레포 주위에서 식량 보급 차량 행렬에 폭격을 가하고 휴전 및 정전협정을 지키지 않는 교전 당사국에 이런 강제가 행해지는 것을 본 사람은 드물다.

마지막에는 ‘국제공동체’의 반발 때문에 민간인 학살은 더 이상 벌어질 수 없다는 물정 모르는 학자들의 탁상공론도 나왔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벌어졌던 유대인 말살이나 1956년의 부다페스트 민중 봉기 때의 유혈 진압 같은 사태는 앞으로 발생 불가능하다는 주장에는 지금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역량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따라 붙었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그 누구도 개입하지 않는 가운데 수개월 동안 여성과 어린이들을 학살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기사 이미지

정리해 보자. 전쟁이 확실히 사라진 시대로 진입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모두 틀렸다. 이뿐만 아니라 그들은 어떤 불균형이 발생했다는 것도 보지 못했다. 두 체제에 살고 있는 사람들, 즉 부자와 빈자 사이의 불균형을 말하자는 게 아니다. 특정 가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과 절대 그럴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 생긴 비대칭을 말하는 것이다. 비대칭에는 테러리스트와 국가 간의 비대칭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와 다른 정치 제도 간의 비대칭도 있다. 민주주의에는 수호해야 할 핵심 가치들이 있지만 이것을 지키기 위해 죽을 준비가 된 사람은 드물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인들과 유럽인들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바라는 사람들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처벌이나 보복에 대한 걱정은 안중에도 없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상황은 없다. 바로 이런 식으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영토인 크림 반도를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다시 가져갔다. 또 러시아는 미국이 보호도 공격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시리아의 지독한 독재자와 연합한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별다른 위험을 감수할 걱정도 없이 발트해의 나라들에도 손을 댈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 지경까지 가면 범세계적인 전쟁이 멀지 않을 것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회원국들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기는 대단히 어려울 것이고, 그때는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러겠다는 목적도 없이, 그러자고 결정한 것도 아닌데 라트비아를 위해 죽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이 모든 일은 20여 년 전 우리가 러시아를 유럽 국가의 하나로 간주하고, 유럽에서 공동의 집을 함께 건설할 수 있는 상대로 받아들였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인위적·필연적으로 모여 있었던 중동 국가들을 우리가 무너뜨리지 않았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미국과 유럽은 이 두 실수에 중대한 책임이 있다. 모스크바의 호전적 정치 제도와 중동의 테러리스트적 정치 제도가 연합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 있을까. 반격할 시간은 아직 있다. 현재 우리의 주적은 모스크바가 아니라 모술에 있다. 한쪽을 무너뜨리려면 다른 쪽의 도움이 필요하다.

알레포의 고난을 무위로 돌리지 않으려면, 또 이 도시의 파괴가 다른 문명 도시의 파괴를 불러오는 사태를 막으려면 이성을 되찾고, 증오를 정리하고, 세속주의 원칙을 가진 나라들을 지원해야 한다. 강력하고 믿을 수 있는 하나 된 유럽의 도움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유럽이 러시아에 의해 해체되는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를 도우러 오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크 아탈리
아탈리 에 아소시에 대표
플래닛 파이낸스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