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띠·어깨띠의 정치문화|김정배<고려대 교수·한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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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는 참으로 오랫동안 이 나라 정치와 사회문화의 기이한 현상의 하나로 머리띠와 어깨띠가 종종 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아 오고 있다. 어느 경우이건 간에 머리띠와 어깨띠가 보이는 장소나 분위기를 보면 대체로 조그마한 모임의 성격이기보다는 많은 시민들이 운집한 곳에서 그러한 「띠」가 목도되곤 한다.
머리에 질끈 동여맨 머리띠나 어깨에서 내려와 허리부분까지 휘어 감싸고 있는 어깨띠는 아마도 이 나라 선량한 백성들의 눈에는 각 이한 현상으로 그 의미를 끌어내고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머리에 띠를 두르고 어깨에 천을 감아야 모임의 성격이나 집회의 성과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연로한 세대와 알게 모르게 무언가를 외쳐 대는 때에는 그와 같은 모습을 흉내내는 젊은 세대도 모두가 추구하는 목표는 동일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나라의 문화수준이 여러 방면에서 한 발짝 진전된 단계에 왔다고 모두가 동의하고 있는 사실을 감안할 때 수시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는 머리띠와 어깨띠는 선량한 시민들의 높은 의식수준과는 다소 걸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곤 한다.
따지고 보면 머리띠와 어깨띠가 등장하는 곳이 항상 일정한 것이 아니고 때와 장소에 따라 그 의미는 여러 가지로 대별되고 있어 한마디로 모두가 나쁘다고 일갈 할 수만은 없다. 지난날 초등학교 학생들이 운동회를 하면서 청·백으로 나뉘어 사용한 머리띠는 애교가 담겨 있었다.
때로 미인대회에서 어느 지역 출신임을 알리는 어깨띠도 그런대로 수긍이 가는 일면이 있다. 전쟁터로 떠나는 장정이 머리띠와 어깨띠를 두르고 주민들의 격려와 환송 속에 출정하는 모습에는 자못 비장한 마음이 피차에 오간다.
그뿐만 아니라 운동선수가 머리띠를 사용하면 날리는 머리칼도 바로잡고 흐르는 땀도 예방하는 목적이라 오히려 싱싱한 기분을 느낄 수가 있다. 구슬땀을 홀리는 농부가 머리띠를 이용하는 것은 생산하는 정경의 표본이라, 쓰고 있는 그 가치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자주 머리띠와 어깨띠가 다른 곳에서 다른 의도로 남용되고 있느 것이 아닌가 해서 식상해 하는 경우가 있다. 조석으로 교통정리에 여념이 없는 분들이 구호가 적힌 어깨띠를 두르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때가 너무나 늦은 것 같다. 은행이나 백화점에서도 글씨가 적힌 어깨띠를 두르고 있는 것을 보지만 어딘가 세련미가 부족한 듯해서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연말이면 어깨띠를 착용한 지도급 인사들이 붐비는 인파 속에서 검소한 연말 연시를 보내자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일상 주변에서 머리띠와 어깨띠의 홍수 속에 본래의 의미나 그 의도를 충분히 감지하지 않고 그대로 스쳐 가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분명히 반문화의 상태로 전락하고 있다.
우리가 머리띠나 어깨띠를 연상할 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정치와 관련된 대회에서 흔히 이 같은 도구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당의 집회나 야당의 집회에서 거의 예외 없이 이러한 띠가 출현하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지만 여러모로 재고해 볼일이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단절을 과시하고 일체감을 뜻하는 처지에서 어쩌면 결연한 의지를 천명하려는 발상에서 고안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사실 우리는 오랜 격동의 세월을 보내면서 정치적인 집회 때마다 이러한「띠」가 남용되어 왔음을 솔직하게 인정을 해야 한다. 그러기에 학생들을 비롯한 일련의 시위대가 때때로 머리띠를 매고 구호를 외칠 때마다 이 역시 같은 모습이 또 출현하고 계승된다는 사실에 자괴 심을 감출 길이 없다. 머리띠와 어깨띠가 선량한 시민을 계몽한다는 본래의 착한 뜻을 떠나 단결을 외쳐 대는 단계에까지 온다 하여도 참을 만큼 참으면서 나쁠 것이 없다고 간주할 수는 있다.
그러나 행여 단결의 범위를 넘어「띠」를 이용한 모습이 일반시민에게 불편함과 두려움을 느끼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이것은 곧바로 이 나라의 정치문화의 수준을 그대로 표출하는 꼴이 되고 만다. 민주사회에서는 머리띠와 어깨띠의 함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주 차분하게 논리적인 처지에서 토론하는 과정이 돋보이고 가치 있는 관행이 된다.
해방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정치는 소위「띠」의 문화가 변함없이 대종을 이루어 왔고 그것이 상존 하는 한 타협과 승복의 자세는 쉽게 정립되기가 어려울지 모른다. 시민들의 문화의식 수준에서 보아도 더 이상 머리띠와 어깨띠의 활용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야 모두가 인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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