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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 길에선 안 넘어지게 50㎝ 끈 당겨 알려주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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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마라톤 국가대표 출신의 회사원 안기형(53)씨는 15년째 시각장애인들에게 마라톤을 가르치고 있다. 매주 토요일 아침마다 시각장애인과 짝을 지어 서울 남산 산책로 6.6㎞를 달린다. 두 사람의 팔은 길이 50㎝ 끈으로 연결돼 있다. 안씨는 “장애물을 만나면 끈을 당겨 서로의 간격을 좁히고, 굽은 길이 보이면 넘어지지 않도록 미리 알려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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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형(오른쪽)씨와 시각장애인 김상용씨가 8일 서로의 팔을 50㎝ 끈으로 연결한 채 남산 산책로를 달리고 있다. 안씨는 달리는 중간중간 김씨에게 산책로의 풍경을 이야기로 전하기도 했다. [사진 우상조 기자]

그와 시각장애인의 특별한 인연은 2002년 시작됐다. 그는 한 시각장애인 마라토너의 부탁을 받고 시각장애인 마라톤 동호회인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클럽’ 회원들에게 달리기를 지도하게 됐다. 하지만 첫 수업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자, 발목을 돌리세요. 다음은 무릎….” 대부분의 시각장애인들이 기본적인 체조 동작도 잘 따라하지 못했다. 이 같은 동작들을 눈으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안씨는 고민 끝에, 체조 동작을 선보이는 안씨 자신의 몸을 시각장애인들에게 만져보도록 했다. 회원들의 머릿속에 동작이 그림 그려지자, 3주 만에 스트레칭을 혼자서도 할 수 있게 됐다.

마라톤 국가대표 출신 안기형씨
시각장애인에게 마라톤 15년째 지도
자신 몸 만져 동작 익히도록 도와

이 일을 계기로 안씨는 ‘시각장애인 눈높이 교육’에 박차를 가했다. 몇 시간 동안 자신의 눈을 안대로 가리고 비장애인과 함께 뛰는 체험도 했다. “주변 차 소리가 평소보다 2~3배 크게 들리고, 바닥의 작은 고랑도 깊숙하게 느껴졌어요. 그때 느낀 공포감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는 일대일 지도를 통해 마라톤 자세를 교정해주기도 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쌓이자 회원들의 달리기 실력도 쑥쑥 늘었다. 그 결과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클럽은 ‘전국장애인체전’에서 몇 차례 메달을 거머쥐었다. 안씨는 “시각장애인들이 달리기를 매개체로 사람들과 어울리고, 건강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계속 뛸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안씨는 시각장애인 마라토너와 짝을 지어 2004년 ‘아마존정글마라톤’, 2006년 ‘사하라사막마라톤’에 출전하기도 했다. “아마존마라톤은 6박7일 동안 밀림을 헤치고, 강을 건너야 했어요. 사하라마라톤은 50도의 무더위 속에서 사막의 모래 바람을 뚫어야 했지요. 지옥의 레이스에 도전한 두 시각장애인을 보면서 이게 바로 마라톤 정신이구나 싶었어요.”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클럽은 현재 시각장애인 50여 명과 자원봉사자 10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그는 처음 온 봉사자들에게 안대를 건네면서 눈을 가리고 달리는 체험을 해보도록 권한다.

안씨는 1985년 경부역전마라톤대회 신인상을 받았고, 현대모비스 실업팀 소속의 국가대표 마라톤 선수였다. 87년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현재 현대모비스 AS 품질팀 차장으로 근무 중이다. 그의 꿈은 시각장애인과의 ‘아름다운 동행’을 계속하는 것이다. “달리고 싶어하는 시각장애인들이 있다면 전국 어디든지 달려가 돕고 싶어요. 제가 달리기 힘든 나이가 되면 시각장애인들에게 물이라도 건네주면서 이 일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글=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사진=우상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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