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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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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2면

포인세티아꽃은 진짜 꽃이 아니다. 잎사귀가 빨갛게 채색되어 꽃처럼 예쁘게 보일 뿐이다.
잎사귀가 한참 벌어질 무렵 오후 2시쯤에 검은 보자기로 덮어놓는다. 대낮에 밤을 연출해 주는 것이다. 밤낮의 길이로 따져보면 밤 시간을 하루의 3분의2로 늘러주는 셈이다.
바로 그 연출 효과가 포인세티아 꽃으로 나타난다. 식물학자들은 그것을 생체리듬의 인공적인 조작이라고 설명한다.
사계중 어느 때나 장미꽃을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아이디어다. 비닐 하우스에서 한여름의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주면 장미는 바깥 세상과는 관계없이 꽃을 피운다.
식물의 경우 생체리듬은 어느 생물보다 민감하다. 사계에 따른 기승전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식물의 감수성은 거짓말 같다.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어느 형사가 장난삼아 화분에다가 거짓말 탐지기를 대고 『이 화분을 불태워 버릴까보다』 하는 말과 함께 눈을 부릅뜨고 화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거짓말 탐지기는 격렬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얼마 뒤에 그 형사는 웃는 얼굴로 물을 주며 다시 거짓말 탐지기를 갖다대었다. 이때는 식물도 마음을 놓은 듯 고요했다.
이것은 미국 다이제스트지에서 읽은 얘기다.
실제로 서울 근교 어느 농장의 주인이 수목들에 경어를 쓰는 경우를 보았다. 나무를 옮겨 심을 때 잊지 않고 『이리로 모셔라』, 『저리로 모셔라』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 주인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지만 그 나름으로 소박한 철학이 있었다. 그런 경어를 쓰면 우선 정원사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 나무를 어른처럼 「모시고」,그런 나무들일수록 죽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아, 자기보다 나이가 몇 배나 더 많은 나무들인데 함부로 다룰 수 있나요. 』
위선은 아닌것 같았다. 나무의 기분을 맞춰주는 것도 「생체리듬」 이론과 일치한다.
식물뿐 아니라 동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젖소에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들려주면 젖이 더 많이 나온다는 실험도 있었다. 그러나 「비발디」 의 『사계』 중 천둥치는「여름」 악장을 들려주었더니 철철 흐르던 젖이 줄어들더라는 것이다.
생물의 이와 같은 「바이오리듬」을 인간에게 유리하게 조작해 득을 보는 경우는 허다하다. 벼의 삼모작이나 닭의 무제한 산난이 그런 경우다.
요즘 김포가도에 휘황찬란한 가로등을 켜놓자 벼들이 깜짝 놀라 결실을 못한다는 얘기는 웃을 수 없는 희화다. 벼들이야 아시안 게임이고, 금메달을 알 턱이 없다. 정부는 농부들에게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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