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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서 낯설어 보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00호 34면

무작정


국어사전 [명사/부사] 1.얼마 혹은 어떻게 하리라고 미리 정한 것이 없음 2.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음


그 여자의 사전 젊었을 땐 해보지 못했던 여행의 방식. 앞으로의 여행뿐 아니라 삶의 스타일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방식


9월이 다 지나가던 때 우연히 책상 위 달력을 본 것이 짧은 여행의 시작이었다. 10월 초 세 개의 숫자가 연달아 빨간 색이었다. 문득 여자는 여름 휴가도, 추석 연휴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비행기와 기내식이 그리웠다. 평생 남의 일로만 여겼던 “연휴에 붙여서 연차 휴가 내보기”를 죽기 전에 해보는 건 어떨까 싶었다.


곧 컴퓨터 화면에 ‘두 시간으로 만나는 유럽’이라는 러시아 극동 항구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꿈으로만 여기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출발하는 바로 그 도시다. 우연은 이어졌다. 다음날 십 년 만에 만난 대학동창이 러시아에 2년간 살았다고 했다. 친구의 입에서 그 도시의 이름이 나왔다. 이건 운명이야. 거기서 기차를 타고 열두 시간을 가면 만나는 다른 도시에서도 서울로 돌아오는 직항 비행기가 있다는 것이다. 다 합해도 나흘이면 충분했다. “밤 기차를 타고 가면 하늘에서 쏟아질 듯한 별빛이 창문으로 보여”라는 말에 더 이상 고민만 할 수 없었다. 연휴는 바로 내일 시작이었다. 10분 만에 최저가로 일단 항공권부터 끊었다.


서둘러 남은 일을 마무리 한 뒤 집에 돌아와서야 이런 대책 없는 여행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늘 여행갈 때면 가성비 최고의 숙소와 맛집, 유명 박물관과 관광지를 깨알같이 검색한 자료를 가져야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나는 스마트폰 검색에 능한 중년여성이 아니던가.


무작정 여행의 부작용은 많았다. 일단 말이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 도시 어디에서도 영어 글자 하나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공항에 내려 스마트폰으로 숙소를 잡기는 했지만 온갖 바디랭귀지를 동원해야 했고 간신히 통역 어플로 물어물어 식당에서 양고기 수프 하나를 주문할 수 있었다.


기차표를 끊고 2등석에 올랐더니 침대 두 개가 바싹 붙어있는 밀실 칸 한쪽에 듬직한 러시아 아저씨가 앉아 있었다. ‘비포 선셋’의 낭만을 떠올리기에는 기차 칸은 너무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같은 구조였다. 게다가 빅토르씨도 에단 호크와는 거리가 먼 중년 아저씨였고, 나도 줄리 델피의 두 배쯤 체중이 나가는 아줌마였다. 무작정 여행의 낭만이 잘못하면 ‘묻지마 관광’인터내셔널 버전으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지나가는 순간, 다행히 빅토르씨는 영어를 할 줄 안다고 했다.


“여자, 남자 같이 한 칸에? 오 노우”라며 당황해 했더니 친절한 빅토르씨는 옆 칸의 젊은 한국 여성과 자리를 바꿔주었다. “어머 멋진 어머니시네요”라는 여성의 찬사에 흐뭇해져서 맥주 한잔을 나눠 마신 뒤 잠이 푹 들어버렸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러시아 말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뭐하시는 거에요. 종점이에요. 빨리 내리세욧!”였을 게다. 아, 잠들어 버린 사이 별빛은 창문 사이로 쏟아지긴 했을까.


무작정의 오류는 계속됐다. 숙소를 정하지 않았다는 내 말에 젊은 여성이 자신의 싼 숙소로 같이 가자고 해서 무심코 따라갔다. 짐을 풀고 대중교통도 어떻게 이용하는지 몰라 혼자 마구 마구 걷다가 밤에 숙소로 갔더니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한밤중에 벌벌 떨며 다시 스마트 폰을 뒤져 옆 숙소에서 잠을 잤다. 그나마 스마트폰의 배터리가 나가버리자 길잃은 사람처럼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헤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기했다. 이 짧았던 무작정 여행에서 어느 곳 어느 때보다도 10월의 서늘한 바람과 그 바람에 뒹굴던 낙엽들, 그 도시의 낡은 벽에 그려져 있던 그래피티들,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들어갔던 카페에서 마셨던 커피와 수프, 우연히 들어간 작은 도시의 역사를 담은 박물관의 그림들, 그리고 시장에서 호두를 팔고 있던 노인의 얼굴들이 내 눈과 귀를 거쳐 어느새 내 가슴 깊은 곳으로 들어와버렸다. 화려한 도시와 안락한 숙소 여행도 많이 가보았지만, 길을 잃고 헤맸던 이번 무작정 여행에서 ‘여행이란 낯선 곳에서 낯설어 보는 즐거움’이란 걸 가장 절실하게 느꼈다. “나는 최근에야 방황하는 기술을 알았다”며 기뻐하던 유명한 학자가 떠오른다. 배낭여행 한번 해보지 못하고 젊음을 보낸 뒤 나는 이제야 조금씩 무작정 방황하는 여행의 기술을 익힐 것 같다. ●


이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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