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자〃-〃더 내라〃로 한달 늦춰 매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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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올해 들어 지난 5월 9일 1차부터 시작되어 9월 22일 4차에 이르기까지 부실기업 정리로 모두 56개 기업이 제3자에 인수되거나 청산, 또는 정리되었다.
4차례에 걸친 부실기업 정리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던 「4차 정리」에도 얽힌 뒷이야기가 무성하다.
★…올해 계획했던 것을 사실상 마무리지은 제4차 부실기업 정리는 진행작업이 순조롭지 못해 당초 8월중 단행하려했던 정부당국의 스케줄이 약 한달 늦어졌다.
부실기업을 맡고 있는 은행이나 회사를 넘겨야 하는 기업주 측은 조금이라도 더 좋은 값을 받아 내려하고, 인수하는 측에서는 한푼이라도 더 깎아 내리려고 하는 씨름이 계속됐기 때문.
특히 마지막 순간까지 애먹은 케이스는 정아(구 명성)그룹의 정리였다고.
전국 21개 지역에 1천 2백 26만평의 땅과 5군데 2천 5백여 실의 콘도미니엄 및 2개 골프장(54홀)을 갖고있는 정아그룹의 자산가치와 수익가치를 놓고 주거래은행인 상업은행과 인수자인 한국화약그룹간에 현격한 차이를 보인 것.
한국화약 측의 주장인즉 정아의 소유토지 중 37%가 콘도 및 골프회원권(약 2만명)과 관련, 지분이 공유상대이고 전 대표 김철호씨의 개인명의 토지 5백여만평이 소송계류중이며 그나마 개발제한 구역으로 묶여 실제 가치가 훨씬 적다는 것.
한국화약 측은 정아의 부채총계가 2천 8백 45억원, 자산부족액이 1천 7백억 원이나 된다고 주장.
그래서 처음엔 「정아 인수로 밑지지는 않겠다」고 여겼던 한국화약 측은 인수포기의사까지 밝혔다는 후문.
그러나 은행측이나 재무부 측은 한국화약 측의 주장이 너무 과장된 것이라고 일축.
결국 정인용 재무부 장관과 김승연 한국화약그룹 회장이 2∼3차 직접 만나 절충한끝에 정아의 부채상환기한을 20년까지 연장해주는 선에서 타결을 보았다.
정부는 정아의 전 소유주 김철호 씨의 전 주식을 무상 소각, 상업은행이 대신 전액 출자한 방식을 취함으로써 뒷날 김씨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시켰다.
★…(주)한양의 계열인 대한준설공사와 한양유통도 공을 많이 들인 케이스.
지난 70년대 후반 중동에 진출, 총 68건 34억달러의 해외공사를 수주한 (주)한양(대표 배종렬)은 중동건설에서 재미를 못보고 큰 부채를 짊어졌는데 그 빚을 덜기 위해 준설공사와 한양유통을 넘기게 된 것.
준설공사는 인천 앞 바다에 1백여만평의 매립지를 갖고있는데 그 땅값과 앞으로 신규로 나갈 매립 허가권 등을 합쳐 자산가치를 3천억원으로 계산했다고.
슈퍼마켓 체인을 갖고있는 한양유통은 가산가치를 1천여억원으로 평가. 이 2개회사를 처분함으로써 (주)한양의 빚은 절반이하로 줄어들 것으로 알려졌다.
준설공사는 잠정적으로 주거래은행인 상업은행에서 인수하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곧 한진그룹의 한일개발로 넘긴다는 얘기.
(주)한양은 현재 잔여 해외공사가 17건 4억 4천 1백만 달러인데 그것만 마치고 철수하도록 되어있다.
★…대우그룹이 인수한 경남기업(전 기업주 신기수)은 김우중 회장 개인으로 넘겼다가 다시 대우로 넘어가는 2단계방식이 적용되었다.
부실 규모가 워낙 큰 경남기업을 관리은행인 외환은행에서 84년 11월 대우에 넘길 때 세금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그러한 방식을 택했던 것.
당시는 상감법이 개정되기 전이라서 경남의 장부상 자산과 실제 자산간의 차액에 대해 경남기업이 인정상여소득세를 원천징수, 납부하게 되어있었다.
대주주에 대한 인정상여소득세로 물게될 이 세금규모가 1천억 원은 넘는다는 것.
그래서 정부와 외환은행은 경남을 대우에 넘기면서 당시 김만제 재무부 장관과 정인용 외환은행장이 대우 김 회장에게 나중에 조세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약속 노트를 써주었다는 후문.
경남기업은 현재 해외에 28건 4억 8천 6백만달러의 잔여공사를 갖고있다.
★…전처럼 이번에도 정인용 재무부 장관이 진두에 나서 정리작업을 추진했다.
정 장관은 정기국회가 열리기 전에 연내 하려던 것을 아예 모두 마치겠다는 생각으로 담당 이재국과 관련 은행들을 독려.
관련 은행장은 물론, 순조롭지 않은 경우 기업을 인수하는 측의 그룹총수를 하나하나 만나 직접 절충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추진되는 상황을 고위층에 지난 8월 12일 중간보고한데 이어 9월 15일 최종보고를 하여 OK를 받았다는 것.
정 장관은 『이번 4차 정리에서 당장 걸려있는 것은 다 처리했기 때문에 금년 안에는 더 이상 부실기업 정리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동양고속이 부실기업으로 정리된 것은 한마디로 해외건설 참여가 결국 모 기업까지 결딴낸 대표적 케이스.
동양고속은 경부고속도로 준공과 함께 국내 굴지의 운송업체로 신장해왔는데 계열 우창건설이 뒤늦게 해외로 진출한 후 중동건설 퇴조로 엄청난 적자를 안게돼 모회사인 동양고속까지 부실화돼 한꺼번에 정리되는 비운을 맞게된 것.
한편 동양고속을 맡게된 우성건설은 지금 남아있는 해외공사(우창건설 분)만 마무리지은 후 완전철수, 국내공사만 일부 맡게 하고 수익성이 괜찮은 수송부문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경제단체들은 이번 조치의 불가피성을 인정하지만 『과연 「특혜로 떠넘기기 식」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었겠는가』라며 조치내용에 대해서는 대체로 회의적인 반응들.
전경련의 신봉식 전무는 『어차피 정리되어야 할 기업이라면 국민경제의 건전화를 위해 하루빨리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정부조치를 수긍하면서도 다른 기업에 모두 떠넘김으로써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자력재생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점은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라고 지적.
전경련의 구석모 한경연 부원장은 앞으로 아예 정부 내에 부실기업정리기능을 공식화함으로써 공개적인 룰에 의한 공식적인 처리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다소 시니컬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중소기협의 조성대 조사이사는 부실기업 정리의 불가피성은 인정하지만 조치내용을 비공개로 한 점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부실기업을 여러 중소기업으로 쪼개 인수시키는 방법도 고려했어야 한다』고 주장.
★…4차 부실기업 정리가 이뤄지자 해당 은행들은 그야말로 「앓던 이가 빠진 듯」 시원해하는 표정.
부실기업 정리가 됐다해도 국제상사 무역부문이나 남광토건, 대성목재를 처분한 제일 조흥 등은 각각 1천 4백억원, 2백억원 정도의 대손을 감수해야했고 또 대손 처리를 하지 않은 기업도 많게는 3천억원 가까운 신규대출에, 기존대출금을 10∼15년씩 거치해 이자한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어서 앞으로 뒤치다꺼리도 적잖은 문제가 될 듯.
또 이번에 큰 덩치의 부실은 대충 마무리가 지어졌다해도 신규 부실의 소지가 큰 해운업계라든지, 또는 이번에 계열사만 정리된 몇몇 기업들이 아직도 적잖은 문제를 안고있어 부실 재발의 가능성을 배제키는 힘든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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