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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호교수가 보고온 연변 동포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19면에서 계속
연길서 최상철교수의 저녁초대를 받아 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소학교 (국민학교) 교사인 부인이 그날은 하루 결근하고 종일 음식을 준비해 연변대 한국인 교수들과 함께 나를 초대한 것이다.
대학당국에서 준 최교수의 집은 단층짜리로 허술하게 보였다.
동네 거리는 비만 오면 길이 질척거리는 비포장이었다.
최교수의 집은 3평 짜리 방 2개가 있는 전체 크기 10평 정도의 작은 집이었다.변소는 집안에 없고 바깥의 공동변소를 이용해야했다.
최교수집의 특징은 집안으로 들어서면 미닫이문이 있고 문을 열자마자 신발을 벗는 조그만 공간이 부엌과 연결돼 있다.
신발을 벗고 비닐장판이 깔린 온돌방에 올라서면 부엌과 찬장과 신발 벗는 곳, 그리고 부뚜막에 걸어놓은 무쇠 솥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세 공간이 벽이나 칸막이가 없이 모두 한 공간에 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최교수의 살림살이가 다른 서민들보다 낫다는 증거인 선풍기 하나가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자전거는 흔해서인지 1대에 1백50원 (4만5천원)으로 비교적 싼 편이지만 그래도 한달 봉급을 넘거나 비슷한 값이다.
중공에서 TV의 경우 흑백1대는 6백원 (18만원), 컬러의 경우는 2천원 (60만원) 이다.
남대문시장을 방불
연변에서 이제 라디오는 보편화됐다. 그러나 TV문화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해 이곳 사람들은 이 문명의 이기를 구하는 것이 최상의 목표가 되고 있다.
돈의 용도가 넓어지고 돈이 더욱 필요해지는 중공사회. 그래서 연길시의 시장바닥이 남대문시장처럼 흥청거리는 것인가 라고 생각했다.
이 자유시장을 거닐며 구경하는 동안 일반점포나 노점상들이 스피커가 붙은 마이크를 들고 손님을 호객하는 모습이 계속 눈에 띄었다.
손님을 끌어야 한다는 것은 물건을 빨리 팔아야겠다는 이유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이 팔아야하고 그래서 돈을 많이 벌고 저축을 해서 고급전자제품을 사야겠다는 「의지가 담긴 상행위다.
이같은 자본주의식 경제개념은 어느새 얼마나 많은 상품을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가 하는 생산경쟁에까지 돌입했다는 것이다.
3년전까지의 집단농장 경영때보다 최근 농산물 생산량은 3배가 늘었다는 이곳 사람들의 말이다.
연길 도착 첫날 상오에 먼저 연변 대학을 방문했다.
연길 도착순간부터 나를 안내한 이종림씨를 따라 대학본부에 들어서니 박문일교장 (총장) 은 여행중이고 정판룡부교장 (부총장)이 나를 맞았다.
한국인 교수가 77%
문학전공인 정부교장은 54세 정도의 단단해 보이는 인상에 양복에 넥타이차림 신사였다.
연변 대학은 연변 자치주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시설이 좋다는 대학으로 교수진의 77%가 한국동포라는 설명이다.
1949년에 설립된 이 대학은 교수·부교수 47명, 강사 1백66명, 조교등 71명, 행정직 l백91명에 4년제 본과학생 1천7백명, 대학원생 1백70명, 그리고 이 대학에서 실시하고 있는 통신강좌 수강생이4천2백명의 작지 않는 규모였다.
이 대학은 간단히 줄여 부를 때 한국의 연세대처럼 「연대」 라고 불러 처음엔 알아듣는데 조금씩 혼란이 오기도 했다.
연변대학을 둘러보면서 가장 관심이 있었던 것은 역시 조선문제연구소·조선문학 및 어문연구소와 도서관이었다.
특히 서일권 조선문학부장(학과장)및 이상순 전 조선문제연구소장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연변대 조선 (한국) 관계연구 중심인물인 그들은 또 한국에서 많은 종류의 서적이 발간되고 있는 줄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들 자료를 구할 수 없느냐고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 도서관은 40만여권의 장서가 개가식 및 서고식으로 되어 있으며 독서용 책상은 비닐덮개로 씌워놓아 한국의 어느 음식점 테이블과 같은 모습을 보여 인상적이었다.
항일사서 김일성 제외
이 도서관의 도서를 둘러보다 깜짝 놀랐었다. 4천여권의 한국발행서적이 보관돼 있는 것이었다. 연변등 중공에서 발간된 여느 책보다도 지질이나 장정이 상대적으로 뛰어나 눈으로 금방 구별이 됐다.
특히 조선문학부등에서 아끼는 책은 『조선왕조실록』 전집이었다.
이 실록은 얼마나 아끼는지 해당학과의 학생들에게도 접근이 심하게 통제될 정도로 모셔지고 있었다.
도서관측에서는 한국으로부터의 도서기증을 상당히 바라는 눈치였다.
이번 연변대학 방문에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조선문제연구소의 허영구교수가 자신이 공동집필한 『동북항일투쟁사』전3권을 나에게 기증했다. 이 책에는 1천7백40명의 한국인과 중국인 「열사」 들이 등장하고 있으나 정작 북한이 「항일운동의 영웅」으로 신격화한 김일성의 이름은 한군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연변에서 놀란 것이 적지 않지만 내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란 사건이 있었다. 연길에서 구해본 한글판 월간잡지의 컬러표지가 한국TV탤런트 원미경의 한복 입은 모습이었다.
처음엔 원미경을 닮은 연변 한국처녀의 모습이겠지 했으나 배경사진이 바로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이고 모델이 입고 있는 한복 옷고름 무늬가 너무나 서울에서 흔히 본 것임에랴 더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연길에서 발간되는 대학노트 크기의 68페이지 짜리 월간잡지 『청년생활』 을 뒤적이다 나는 잇따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4페이지나 할애한 기사 하나의 제목이 「남조선의 수출대왕-김우중」이었다.
수출·성장전략 특집
「장오」라는 이름의 기자가 쓴 이 기사에 또 한번 놀란 것은 기사내용이 아주 공정하고 편견이 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3회에 걸쳐 연재된다는 이 기사의 첫회분에서 「장오」 기자는 서두에서『남조선경제는 60년대 초부터 70년대에 세인들의 주목을 끌만큼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1961년부터 1976년에 이르는 기간 국민총생산액은 해마다 평균 9·3%씩 장성하여 (성장하여) 16년 동안에 4배나 늘어났으며 대외무역 연평균성장률은 23·8%에 도달하였다. 하여 세계적으로 가난하던 지구로부터 일약 「신흥공업화」 국가와 지구의 행렬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전제하고 「대우실업」이 기업을 일으키는 과정을 에피소드를 섞어가며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상당 부분이 서방국가에 대한 견문기나 서방의 토픽성 흥미기사가 많은 것도 흥미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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