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점 보이니 수모 당한다.|김철수<서울대 교수·헌법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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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후지오 망언에 놀란 국민들에게 독도 영유권 주장은 일본의 침략 근성을 드러낸 것 같아 씁쓸하다. 대한제국을 함포 외교로 개항케 하고 강박에 의하여 합방조약을 체결한 정사를 무시하고 고의적으로 역사왜곡을 일삼는 일본 지도층의 황국사관 복고주의를 볼 때 다시 정한론이 등장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연전 일본의 한 경제학자는 한국에 와서 『옛날의 일본은 미련하여 뺏어 먹을 것만 생각하여 침략을 일삼았으나 현재의 일본은 깨우쳐서 사먹는 것이 싸게 먹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우리와의 무역역조를 통한 시장점령·기업체 계열화로써 옛날의 식민지시대의 강탈보다도 더 큰 재미를 보고있다는 지적이라 모골이 송연함을 느꼈는데, 정치가 중에는 아직도 직접수탈을 원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일본 정치가의 오만불손한 망언을 대할 때마다 아데나워나 브란트와 같은 독일정치가의 선린외교를 생각하게 된다.
아데나워는 독일의 평화는 수백년에 걸친 프랑스와 독일간의 적대 감정의 해소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독불 간의 민족화해를 위하여 굴욕적일 정도로 프랑스에 접근하였다.
독일 통일보다는 서구의 통합이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아래 유럽경제공동체나 유럽방위 공동체 구성에 앞장섰고 활발한 문물교류를 통하여 양국간의 국경까지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 결과 나치 피해국인 프랑스인의 대독 감정도 호전되었고 수차 점령당했던 독일인의 대불감정은 형제처럼 친밀해지게 된 것이다.
브란트는 폴란드의 나치 희생자 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으며 과거 독일의 영토였던 오데르-나이세강 동변의 영토를 포기하고 패전으로 인한 영토상실의 현상을 승인하면서 현재의 국경선의 불가침을 조약으로 다짐했다.
이 태도는 인접국인 체코슬로바키아나 헝가리 등에도 적용되어 동방외교의 결실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 결과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될 수 있었고 오늘과 같은 평화공존과 양독의 번영이 결과된 것이다. 브란트의 동방외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 민주당과 기독교 사회당·사회민주당에 의한 대 연정이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동구제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동서독간의 교역을 확대하고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하여 양대 정당이 거국내각을 구성하여 정책을 변경한 것이 오늘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온 것이다.
이 시기에 브란트 외상에 의한 할슈타인 원칙의 파기, 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와의 국교수립이 행해졌다. 국내적으로는 독일 공산당의 재건을 허용하였고 국가비상사태에 대비한 합의 개헌을 단행하여 국내체제를 정비하였다. 나라의 위기극복이나 대외정책의 변경을 위하여 소극적인 정치휴전이 아닌 적극적인 거국체제를 구축한 독일국민의 지혜 또한 본받을 만하다.
사실이지 일본 정치가들이 망언을 농하고 일본 정부가 고자세로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국내정치·경제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치 단결하여 일본의 재침략을 예방하고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완전 독립을 추구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일본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야가 사사건건 대립하여 서로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인상을 주고 남북이 분할되어 외교경쟁을 벌이고 있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허점을 보여 호기도래라고 생각게 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의심스럽다.
5·16 이후의 대일 저자세 외교를 청산하고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한 외교정책을 수립하기 위하여서라도 외교에 있어서만은 거국일치의 합의가 있어야 하겠다.
국회 외무위원회조차 열지 못하고 외교문제에서 조차 비난성명발표로 시종하고 있는 정치는 한심하기만 하다. 합의개헌의 전도는 암담하고 평화적 정권교체마저 순조로울지 걱정인 국민들은 위기극복을 위하여서, 또 외국의 수모를 면하기 위하여서 여야의 일대 영단을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국내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여야는 합의정치를 단행해야만 할 것이다. 여야는 당리·당략에만 치우치지 말고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하여 대 연정을 펴거나 소 연정이라도 구성하여 합의개헌을 성공시켜주기 바란다.
합의개헌으로 정통성의 위기를 극복하고 장외에 있는 국민들을 장내로 끌어들여 정정당당한 페어플레이를 연출할 때에만 국민들은 박수를 칠 것이요, 국민의 지지를 얻는 정권만이 외국의 모멸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을 여야 정치인들은 명심하여야하겠다. 정치휴전기에 합의정치를 이룩할 수 있는 정치개혁의 구상이 다듬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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