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사이드] '김영란법' 서약서, 양심의 자유로 본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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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부정한 청탁을 거부한다"

서울의 한 구청에서 근무하는 A주무관은 얼마 전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ㆍ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직원 교육에 참석했다. 외부 강연자가 법의 취지를 설명하고 상황별 대응 요령을 알려준 실속 있는 강의였다. 교육이 끝나자 강의 담당자가 법 준수 서약서를 작성하고 나가라고 안내했다. 서약서에는 '어떤 경우에도 부정청탁과 금품 수수 등을 하지도, 받지도 않겠다. 위반 시 관련 법령에 따른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청탁금지법 19조 '서약서 제출' 의무화
처벌 없지만 기관엔 '면책용 보증수표'
인권위 과거에 "서약서 강요 인권침해"로 규정
"'침묵의 자유'는 헌법적 권리" 학계 의견도

형식적인 것이려니 하고 서명을 했지만 떨떠름한 느낌이 들었다. 서약서를 강요하는 게 올바른 일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A주무관은 "각자의 판단에 따라 자율적으로 서약서를 작성하는 거라면 문제 될 게 없지만 이걸 법으로 강요하는 게 온당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청탁금지법 준수 서약서, 괜찮은 걸까

청탁금지법 준수 서약서에 자필 서명해 제출하는 건 적용 대상 기관들의 공통 의무 사항이다. 이법 19조에 '서약서를 받아야 한다'고 돼있다. 권고가 아닌 의무다. 이 때문에 법 시행 전부터 모든 공공기관들이 청렴 교육과 함께 직원들에게 서약서를 받았다. 언론사 등 법 적용을 받는 민간 법인들도 마찬가지다. 일부 기업에서도 청탁금지법 적용 대상과 접촉이 잦은 대관ㆍ홍보업무 담당자들에게 서약서를 받고 있다.

서약서 자체가 법적 효력을 갖는 건 아니다. 다만 서약서를 받지 않은 기관의 직원이 법을 위반했을 경우에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기관이 감독 책임을 소홀히 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어서다. 청탁금지법은 불법을 저지른 직원과 기관을 모두 처벌하는 양벌규정이 있다. 그래서 기관들로선 직원들 의사와 관계 없이 서약서 제출을 강제한다. 일종의 '면책용 보증수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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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송파구청 청사에 걸린 청탁금지법 준수서약서 현수막. 준법서약서 제출을 강요하는 건 인권침해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런 서약서 제출 의무화 규정이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 동안 각종 서약서 제출을 강요하는 것에 대한 인권침해 논란이 많았다.

지난 해 9월 경기도인권교육연구회는 경기도교육청이 교직원 15만여 명에게 '음주운전 시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내용의 '음주 근절 서약서' 작성을 강요한 게 인권침해라며 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당시 김민태 경기도 학생인권옹호관은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내용까지 있어 인권적 관점에서 보면 명백히 준법서약서에 준하는 양심의 자유 침해"라고 지적했다. 오동석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원하지 않는 서약을 강요하는 것은 행복추구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서약서 강요는 양심의 자유 침해" 과거 사례 많아

2007년에는 장애학생이 특수학교에 입학할 때 서약서 제출을 강요한 게 인권침해에 해당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인권위가 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서약서 제출 규정을 학칙에 둔 전국 62개 특수학교들이 해당 규정을 삭제하는 것으로 논란이 종결됐다.

2013년에는 군부대에서 정부 비판적이거나 종북 성향의 웹사이트 및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지 않도록 장병들에게 '보안서약서'를 받은 것에 대해 인권위가 "양심의 자유 침해"라고 판단한 적이 있다. 장병들의 금연 실천을 위한 금연서약서 작성도 인권위는 "목적이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운영과정에서 정도를 지나쳐 지휘권을 남용한 것이며, 헌법 제10조의 일반적 행동자유권과 헌법 17조의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결정했다.

헌법 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인권위는 '양심을 언어에 의해 표명하도록 강제 당하지 아니할 자유' 즉 '침묵의 자유'까지 포괄한 개념으로 해석하고 있다. 김영란법이 규정한 서약서 제출 의무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권익위는 인권침해 요소를 검토해 수정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김영란법 해당 조항에 대해 2건의 진정서가 접수됐다"고 밝혔다. 인권위에 따르면 김영란법 시행일 당일인 지난달 28일 부산에서, 그리고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각각 1건씩 인권침해 사건 진성서를 접수했다. 인권위 관계자는 "진정인은 모두 김영란법 적용 대상자이며, 규정에 따라 신상은 공개할 수 없다"며 "서약서 강요행위의 인권침해 여부는 사안별로 검토해 결정해야 할 사항"이라고 말했다. 인권침해 진정 사건 처리 기간은 통상 90일이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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