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3세기 히미코여와때 신라와 교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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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구주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 어떤 관계를 갖는 땅인가.
일본열도의 지도를 펴보면 구부러진 막대기 모양을 한 지형에 그 남서단에 자리잡은 큰 섬이 바로 구주(규슈)다.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어 비행기로 김해공항에서 구주의 복강 (후쿠오카) 공항까지는 비행시간이 불과 36분밖에 안 걸린다.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마·일기 두섬이 점재해 있으며 행정구역은 7현으로 구분되어 있다. 일본전국에서 기후가 가장 온난하며 우량이 많은데다가 태풍의 진로가 되어있기도 하다. 이섬 남부지방에는 열대식물이 무성하여 이채롭다.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동안을 문화사적으로 금석병용기라 부르는데 일본서는 미생식(야요이식)시대라고 한다. 대륙양식의 토기가 출토된 지명을 연대구분에 쓴 것이다. 이 미생식문화는 북구주에서 발생해 차츰 일본의 딴지방으로 번져갔는데, 그뒤 북구주지방의 미생식문화는한반도와 가장 접근해 있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토대로 해 동검동모·철기· 한경·유리장신구등 수입기물의 발굴량에 있어서, 또 고인돌·옹기무덤등 특수한 묘제의 보급도에 있어서, 딴지방과는 두드러진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말하자면 가장 가까운 한반도의 문화를 신속히 그대로 받아들인 셈이다. 북구주의 선진성은 구주라 할지라도 남과 북이 서로 다르다. 구주의 중·남부에 살았던 종족을 특히 웅전(구마소), 준인(하야도)이라 불렀는데, 이들의 문화는 북구주 것과 다르고 이들은 오랫동안 대화(야마토)조정에 복종치 않고 항거했던 것이다.
이 당시 북구주 각지에는 많은 소국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그들 수장중에는 이미 1세기께에 후한에 조공하여 인수(인끈)를 받은 노(나)국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소국은 서로 불화하여 싸움이 끊일 새가 없었다. 3세기께에 접어들자 비미호(히미코) 라는 여왕이 나타나 사마대 (야마다이)국을 세워 여러 소국을 통합지배하니 비로소 평화를 유지하게 되었다. 여왕은 북구주를 통치하면서 위에 사신을 자주 보내고 때로는 신라와도 교류하여 외교활동을 펴 나갔다.
그런데 이 사마대국이 어느곳에 있었느냐는 문제를 놓고 학계에서는 설이 분분하다. 그 비정지에 대한 견해가 50여군데나 된다. 구주라는 말뜻은 중국어로는 「전중국」이란 뜻이니 사마대국이 있는 곳(나라) 이 곧 「전위국」이란 뜻을 가진 것을 보면 사마대국은 구주안에 있다는 뜻이 되며 현재 구주설이 압도적이다.
고분시대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문화도 대륙계통의 횡돌식석실, 특이한 장식고분, 석인석마등이 구주에 들어와 발달하면서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대체로 구주인의 기질은 한마디로 과감·용맹·강인함이 그 특질이다. 구주태생은 아니나 구주의 성주가 되어 큰 성벽을 쌓고 살다가 죽은 가등(가토)청정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동쪽을 진격한 총지휘대장이었고, 정유재란때는 울산성에서 명군과 교전했던 무장으로 성품이 저돌적이고 진취성이 강한 인물로 믿어져 길이 그의 인품이 구주인에게 영향을 끼쳤다. 근대에 와서 덕천막부를 뒤엎고 왕정복고를 꾀하여 마침내 명치유신을 완성시킨 주역들은 대부분 구주출신의 인물이었다. 그 중에도 선봉장격인 서향륭성(사이고·다카모리)·대구보리통 (오쿠보·도시미쓰)은 토막연합군을 이끌어 지휘하여 명치신정부 수립의 길을 열었다.
정론가·역사가·언론인으로 유명한 덕부(도쿠도미) 소봉은 웅본출신이다. 『국민신문』을 창간해 자기의 주장을 퍼나갔는데 두번이나 민중이 달려들어 사옥을 불지르는 변을 당했어도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아니했다.
그는 또 절륜의 정력가로 평생 집필한 저서가 1백4권에 글자수로는 2천6백만자를 넘는다고 한다.
웅본시내에 그의 기념관이 있다.근대 작가로 문단의 중진이었던 덕부담화는 그의 아우다.
구주는 일본유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오로지 퇴계선생의 학설을 토대로 하여 수립했거니와 그러한 영향으로 구주는 유교적 풍습이 농후하다. 남존여비적 기풍에 충효사상이 강하고, 지금도·식품에 한국엿이 웅본토산명물로 생산되며, 개고기를 먹는 곳도 구주이니 흥미롭다.
고대 중국 서진의 사학자 진수가 엮은 『삼국지』안의 「위지」에실려 있는 「왜인전」은 일본 (그 당시는 왜)의 국토·주민·생활의 동태를 서술한 기록물중 가장 오래되고 소상하다. 진수가 죽은 연대가 대략 270년께니, 이 「왜인전」안의 실상은 기원 3세기전후의 상황이다. 진수는 같은 시대의 사학자인 어권이 이미 편『위략』을 참고로 이 기록을 남긴듯 하다.
이번 제2차대전에 일본이 패망하자 극한상황에 놓여 허탈한 일인들은 새삼 그들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기운이 줄기차게 일어났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네 학자들이 쓴 역사서적은 제쳐놓고 중국학자가 쓴 「왜인전」에 관심을 집중, 드디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 그들은 이 기록에서 끝없는 상상의 나래를 퍼왔던 것이다. 「왜인전」은 대략 이렇게 시작된다. 『왜의 사람들은 대방(군)의 동남방, 큰바다 가운데(도) 살고 있으며, 산으로 이루어진 섬에 의하여 거리며 마을을 이루고 있다. 원래는 1백여국으로 나눠져 있었다. (그가운데)한시대에 조견하러 오는 나라도 있었다. 이제 사자와 통역이 가능한 나라는 30국이다』 「왜인전」은 이어 『남으로 향하여 가면 사마대국에 도착한다. 이곳은 여왕이 도읍으로 정한 곳이다. (이 나라에 닿으려면) 해상 항로로는 열흘이 걸리고, 육로로 가면 한달이 걸린다. 그 (여왕국) 남쪽에 구노(구나)국이 있다. 남자가 왕이다. 그 장관에 구고지비구(구코치히쿠) 가 있는데, 이 나라는 여왕에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적고있다. 「왜인전」엔 또 『왜국은 본시 남자가 왕이 되어 70∼80년동안 왕위에 있었으나 그것이 어지러워져 각국이 서로 다투고 있었다. 그래서 각국이 상의끝에 한사람의 여자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그 여왕의 이름이 비미호라한다. 그녀는 귀신술에 능통하여 그 영력은 일반사람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다. 이때 벌써 상당한 나이였으나 남편을 두지 않고 남동생이 있어 그녀를 보좌하였다. 여왕이 된 뒤로는 그녀를 본 사람이 드물고, 종 1천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다만 한사람 사나이가 음식을 나르며 그녀의 말을 전하고 거실 출입을 허락하고 있었다. 궁전 망루 성벽을 엄하게 설치하고 항상 무기를 든 자가 경호하고 있었다. 비미호가 세상을 떠나자 큰 무덤을 만들었는데 직경이 1백보남짓 되었다. 비미호와 함께 순장한 노비는 1백여명이 넘었다. 새로 남자왕을 세웠더니 나라안이 복종하지 않고 서로를 죽여 1천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다시 비미호와 동족여자인 일여라는 나이 13세 아이를 왕에 앉히자 나라가 겨우 진정하였다』는 기록도 있다.「왜인전」에 나오는 사마대국과 여왕인 비미호에 대한 동경은 대단하다. 매년 전일본항공회사가 전국에 선전하여 고대사 심포지엄참가자를 모집하여 다투어 모인 수백명의 참석자들은 며칠동안 호텔에 묵으면서 열띤 토론을 벌이는데 그 중심교재는 물론 「왜인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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