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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독 뒤 26년 지났지만 사회 통합은 아직 진행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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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김준영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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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모드로 옛 동독 마지막 총리는 1990년 통독에 합의해 준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에게 배신감은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가 고르바초프를 속이고 통일 독일이 나토에 잔류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진 박종근 기자]

많은 한국인은 로타어 데메지에르가 독일 통일 전 동독 최후의 총리인 걸로 잘못 알고 있다. 데메지에르는 베를린장벽 붕괴(1989년 11월 9일) 후 90년 3월 18일 동독에서 실시된 최초의 자유총선거 후에 출범한 동독 기민당(CDU) 중심 연립정부의 총리였다. 데메지에르 정부는 공산당 정부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과도정부였다. 그를 동독 기민당 당수에 지명한 것도 서독의 통일 총리 헬무트 콜이었다. 동독의 마지막 총리는 베를린장벽 붕괴에서 3·18 총선까지 동독 공산당(사회주의통일당=SED) 정권을 이끈 한스 모드로(88)다. 모드로는 84년 드레스덴을 방문한 김일성을 사회주의통일당 드레스덴 서기장 자격으로 접대하고 그 이듬해 김일성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의 환대를 받았다. 동독 붕괴 과정과 북한에 관한 ‘스토리’가 많은 그가 국제교류재단(이사장 이시형) 초청으로 서울에 왔다. ‘독일 통일 패자’의 이야기가 궁금해 그를 만났다.

김영희 묻고 한스 모드로 마지막 동독 총리 답하다

김영희=동독 공산당(사회주의통일당=SED) 드레스덴 당 서기장이던 84년 김일성이 드레스덴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 호스트 역할을 하셨는데 그 이야기로 시작하죠.
모드로=김일성 주석은 당시 동독뿐 아니라 다른 동유럽 국가도 방문했습니다. 84년 드레스덴을 방문한 김 주석은 사흘간 머물렀어요. 나는 그때 김 주석과 식사도 같이 하면서 뜻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김 주석의 방문에 대한 답방으로 나는 이듬해인 85년 평양을 2주간 방문했습니다.
김영희=당시 직접 만난 김일성의 인상은 어땠습니까.
모드로=85년 8월 평양에서 그를 만났을 때 두 가지를 느꼈습니다. 첫째는 김 주석이 남북 통일에 대해 굉장히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는 내게 “독일 상황을 보면 독일의 통일은 어려울 것 같다”면서도 “남북한의 통일은 꼭 이루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내비쳤습니다. 당시 유럽은 냉전이 한창이었고 한반도는 전쟁 후유증을 겪으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김 주석은 당시 베트남 통일이 전쟁을 통해 이뤄지는 것을 보면서 반면교사로 삼은 것 같습니다. 한반도 통일은 전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말이죠. 두 번째로는 김 주석이 “우리가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한 것이 기억납니다. 그는 “전쟁 후 소련과 중국의 도움으로 경제적 발전을 이루고 있는 북한과 달리 남한은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말하며 “미국이 남한을 도와주고는 있지만, 이때 오히려 우리가 조금 더 발전해서 남한을 도와줬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후회했습니다. 그는 “북한이 남한을 도와줄 기회를 놓쳐 결국 통일의 기회를 놓친 것 같다”고 말했어요. 그러나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는 말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김영희= 김일성이 통일은 하고 싶지만 전쟁은 안 된다, 50년 적화통일을 위해 일으킨 전쟁에 대해 후회한다는 뜻입니까.
모드로=정확히 김 주석의 판단이 어떤 것인지 말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를 만나며 받은 느낌은 그가 한국 발전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김일성은 분명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느꼈어요. 대신 남북 관계를 대화로써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받았었죠.
김영희=2014년 박근혜 대통령은 독일 드레스덴을 방문해 드레스덴 선언을 했습니다. 당시 북한이 그 선언에 대해 격렬한 반응을 보였는데 그런 반응이 김일성의 드레스덴 방문과 관련이 있다고 보십니까.
모드로=크게 두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김 주석은 드레스덴에 비행기가 아닌 기차를 타고 왔습니다. 또 드레스덴은 동독에서 핵 연구가 앞섰던 곳입니다. 김 주석은 당시 엘베 강에서 증기선을 타고 또 봤는데 증기선의 기술을 배워 평양에 가지고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내가 받은 북한의 책자엔 북한에도 증기선이 취항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제가 봤을 때 김 주석은 군사적 무기를 만들기 위해 증기기관 기술을 배워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영희=독일 통일 과정에 대해 묻겠습니다. 정식 통일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에서 동독의 파워엘리트들은 동요하거나 공포감에 사로잡히진 않았습니까. 예를 들어 동독군의 장성들, 그리고 당 간부들은 53년의 동베를린 사태나 헝가리 사태(56년), 천안문사태(89년)처럼 군대를 동원해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진압하자는 압력은 없었습니까.
모드로=물론 당시에 동독 내에서는 시위가 많이 일어나 긴장된 상태였습니다. 데모라는 것은 언제든 큰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89년 10월 12일 에리히 호네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서기장은 ‘유사시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는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호네커는 절대로 폭력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89년 12월 7일 시작한 원탁회의에서 ‘폭력은 안 된다’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당시 동독에는 35만 명 정도의 소련군이 주둔해 있었는데 만약 폭력사태가 확산돼 소련군에게까지 영향이 미친다면 상황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상황이 나빠져 연합군까지 들어왔다면 더욱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 겁니다.
김영희=모드로 총리는 군대를 통한 시위 진압을 원치 않았는데, 그 아래 간부들은 어땠습니까.
모드로= 당시 총리로서 비폭력을 원했고 경찰과 군대도 따라주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기초이기 때문이죠. 정기적으로 경찰과 군대 관계자들과 만나 대화를 나눴습니다. 당시 저는 총리로서 큰 책임을 갖고 경찰·군대와 함께 노력해 나갔습니다.
김영희=통일독일의 초대 총리인 헬무트 콜은 통일 후 옛 동독의 파워엘리트들을 선별적으로 재고용했습니다. 그 방식이나 기준에 불만은 없었습니까.
모드로=상당히 쉽지 않은 질문이고 오늘까지도 굉장히 큰 파장을 미치는 일입니다. 통일 당시 동독 엘리트들은 소수만 뽑힐 수 있었고, 대부분의 동독 사람들은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습니다. 당시 저는 한스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에게 “왜 소련에서 공부한 동독 사람들을 다 내보내느냐”고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국에서 먼저 공부한 뒤 소련에서 학위를 따온 것이면 인정한다. 또 소련에서의 석사 학위는 인정하지 않지만 박사 학위는 인정해 주겠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었죠. 그러나 이후 동독 출신 사람들이 이런 상황과 관련해 정부에 소송을 걸고 승소하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많이 나아졌습니다.
김영희=89년부터 90년까지의 동독처럼 북한이 만약 붕괴과정에 진입하게 된다면 북한의 파워엘리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북한엔 핵무기, 미사일과 잠수함발사미사일(SLBM) 같은 대량살상무기(WMD)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드로 총리께서는 이 시점에 한국이 북한 파워엘리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드로=답변하기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통일 후 서로 협력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게 필요합니다. 수준과 상관없이 연구소나 기업 등이 함께 협력해야 하는 거죠. 이미 58~59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시 미국 대통령은 독일 통일 후 동독이 어떻게 발전해 나갈 건지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또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한국은 서독만 보지 말고 동독 사례도 보라는 것입니다. 동독에서 통일과정까지 어떤 프로세스가 진행됐는지 연구해 보라고 제안합니다. 단지 이데올로기만 얘기하는 것은 발전을 위한 길이 아닙니다. 또 제안을 드리고 싶은 것은 “통일 후 북한은 텅 비게 될 것이다”는 메시지는 절대 보내선 안 됩니다. 동독은 하나의 독립적인 국가로 존재했습니다. 같은 논리는 북한에도 해당됩니다.
김영희=90년 7월 소련에서 콜-고르바초프 회담이 열렸습니다. 거기서 마침내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통일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잔류를 수락하여 독일 통일의 최대 장애물이 제거됩니다. 당시 이 결정과 관련해 고르바초프에게 배신감은 느끼지 않았습니까. 모드로 총리의 친구였을 발렌틴 팔린은 “고르바초프가 동독을 너무 싸게 서독에 팔아넘겼다”고 항의하고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국장 자리를 떠났습니다. 팔린의 의견에 동의하십니까?
모드로=먼저 고르바초프가 동독을 서독에 싼값에 팔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소련은 이 협정으로 대가를 받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125억 마르크를 받긴 했지만 그것은 군대 철수 비용으로 받은 것이지 그 외에는 어떤 돈도 받지 않았었죠. 다음으로 고르바초프는 당초부터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는 나토 확장에 반대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독일 통일 후 나토는 동쪽으로 800㎞ 정도 확장했습니다. 그래서 고르바초프는 콜에게 속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김영희=모드로 총리께선 2년 전 한 인터뷰에서 “동·서독 간에는 통일 후 24년이 지난 지금도 이중성(Zweiheit)이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정치적인 통일은 됐지만 옛 동·서독 간의 사회적·문화적 통합 내지 동화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까.
모드로=나는 아직까지 사회 통합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매년 독일연방 하원에서는 통일 후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고 있는데 나는 그 어떤 보고서에서도 “동·서독이 완전 통합됐다”는 말을 찾을 수 없었어요. 오히려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뿐입니다.
김영희=최근 베를린과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 선거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기민당이 연속으로 패했습니다. 메르켈 총리는 난민 문제 딜레마에 빠졌는데 총리께서 의장으로 계신 좌파당(Die Linke)에서는 난민 문제에 대해 어떤 해법을 가지고 있습니까.
모드로=메르켈 총리와 기민당이 직면한 문제의 원인이 난민 이슈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에 거대 정당들은 말만 할 뿐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국민이 투표를 해도 큰 변화를 기대하지 못하고 결국 투표를 하지 않습니다. 또 독일은 프랑스·헝가리처럼 점점 우익·파시즘 성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내년에 독일 연방하원 선거가 있는데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마도 제가 원하는 독일로 나아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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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 드레스덴을 찾은 김일성 주석을 모드로 당시 드레스덴 당 서기장이 영접하고 있다. [중앙포토]

옛 동독 공산정권의 마지막 총리(1989년 11월 13일~90년 4월 12일). 개혁에 우호적이었던 모드로 총리는 “모든 공직의 민주적 쇄신”을 주창했다. 그는 ‘(서독과의) 협조적 공존’은 지지했지만 통일은 거부했다. 헬무트 콜 총리와의 동·서독 정상회담을 통해 양 독일 간 조약공동체를 형성하기로 합의했다.

정리=김준영 국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