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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조양호는 왜 독배를 들이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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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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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논설위원

현대차그룹과 한진그룹의 차이는 뚝심에서 갈렸다. 버틴 쪽은 살고 못 버틴 쪽은 죽었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얘기다. 해운업의 위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년 전쯤 상황이 크게 나빠지자 정부와 채권단이 낸 묘수는 ‘떠넘기기’였다. 공교롭게 두 회사 오너에겐 모두 잘나가는 시숙(媤叔)이 있었다. 한진해운은 한진그룹에, 현대상선은 현대차그룹에 인수를 요청했다. 현대차그룹은 버텼다. 단호히 No였다.

관료와는 싸울 수 있어도
통치권에 맞설 수는 없어

반면 한진의 조양호 회장은 물렁했다. 이사들의 거센 반대를 물리치고 인수를 결정했다. 한진해운의 전 회장인 죽은 동생 조수호씨 생각, 선친이 일군 기업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컸을 것이다. 인수 후 2년간 계열사를 동원해 1조2000억원이 넘는 돈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헛일이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대한항공마저 수천억원을 벌고도 한진해운에 물린 돈을 물어주느라 적자가 나는 곤욕을 치르고 있다. 한진해운은 사실상 청산 절차를 밟고 있다. 그는 대한항공마저 잃을 수도 있다. 그는 그날의 물렁한 결정을 지금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조 회장은 며칠 전 400억원의 사재를 집어넣었다. 법과 원칙에 어긋난다며 버티던 그다. 그런데도 정부는 추가 사재 출연과 무한책임을 요구한다. 은행을 동원해 대한항공 돈줄까지 죌 수 있다는 으름장도 놨다. ‘무능한 정부, 아마추어 구조조정’, 언론의 지적이 거칠어질수록 한진에 대한 압박 강도도 세졌다. 급기야 지난 13일엔 대통령까지 나섰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구노력이 부족했다”며 “도덕적 해이, 무책임, 묵인하지 않을 것”이란 말까지 했다. 대통령의 말은 무게가 다르다. 관료와는 싸울 수 있지만 통치권과 맞설 수는 없다. 조 회장은 대통령의 발언을 전해 듣고 안색이 창백해졌다고 한다. 그는 즉각 어떻게든 600억원의 추가 자금 지원을 결의해 달라고 대한항공 이사회에 요청했다고 한다. 대한항공이 지난 일요일 예정에 없던 긴급 이사회를 연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사외이사들은 또 반대했다. 곧 망할 회사에 지원했다간 배임죄를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전례도 꽤 있다. 1997년 부실 계열사를 지원했다가 한화의 김승연 회장은 2012년 옥살이를 했다. 줄소송도 두렵다. 잘못하면 사외이사 개인이 수십억~수백억원씩 물어줘야 할 수도 있다.

일이 이렇게 꼬인 데는 정부 책임도 크다. 금융위원회는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가자마자 “현대상선이 (한진해운의) 우량 자산을 인수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청산을 기정사실화한 것이다. 대한항공의 한 사외이사는 “정부가 청산하겠다는 회사에 돈을 넣은 게 되기 때문에 100% 배임에 걸린다는 게 법률 자문 결과”라고 말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크게 두 가지다. 물론 둘 다 문제는 있다. 첫 번째는 이것이다. ①대한항공 사외이사들은 전원 사표를 내라. ②그 빈자리를 친정부 인사로 채워라 ③그들이 배임죄를 무릅쓰고 한진해운에 대한 지원 결의를 하도록 하라. 문제는 정부가 과연 그런 인사를 구할 수 있느냐다.

아니라면, 대통령이 통치권 차원에서 배임죄를 묻지 않겠다고 공개 약속하는 것이다. 어차피 법과 원칙은 깨진 지 오래다. 뭐는 못하랴. 효과적으로 수습이라도 해야 한다. 그래도 시장에선 안 믿을 것이다. 대한항공 소액주주는 소송을 낼 것이다. 그땐 대통령이 사재를 털어야 할 수도 있다. 다만 대통령에게 그만한 돈이 없을 것 같아 걱정이다.

이도 저도 안 된다면 조 회장이 독배를 들이켜는 수밖에 없다. 역시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모든 책임을 떠안겠다고 사외이사들을 설득해 600억원을 넣거나, 돈을 넣지 않고 버티다 권력의 몽둥이를 맞는 것이다. 조 회장은 전자 쪽을 택했다. 어젯밤 대한항공은 긴급 이사회를 또 열어 결국 600억원 지원을 결정했다. 하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조 회장은 게도 잃고 구럭도 잃을 가능성이 크다. 섣부른 권력에 서툴게 맞서고 대응했기 때문이다. 이게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