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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인사이트] 국경 없는 신화…중국 신화도 우리 창의력의 원천으로 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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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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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자
연세대 중국연구원 전문연구원

중국이 추석인 지난 15일 실험용 우주정거장인 ‘천궁(天宮) 2호’ 발사에 성공했다. 천궁 2호는 우주 궤도에 머물면서 14가지 실험을 진행할 예정이다. 중국은 달 탐사위성을 달의 여신인 ‘항아(姮娥)’라 부르더니 우주실험선 이름으로는 항아가 원래 살던 곳으로 하늘의 궁전이란 뜻을 지닌 ‘천궁’을 갖다 붙였다. 중국 신화 속 세계가 21세기의 우주에 재현되고 있는 셈이다. 신화와 과학이 만나고 있는 중국의 현실은 우리에게 무얼 시사하나.

톡톡 튀는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IT의 틀 안에 담아낼 수만 있다면
엄청난 문화 콘텐트 생산과 함께
4차 산업혁명에 깊은 영감 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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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문화적 역량 -‘이야기’의 힘

신화는 보통 상상력의 원천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산해경(山海經)』을 비롯한 중국 고대 문헌에 기록된 신화들은 그 확장성에 한계가 있었다. 허구적 상상력보다는 역사적 사실을 중시하는 게 고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주류 사회의 지식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최근 중국에선 소수민족의 신화가 관심을 끌고 있다. 소수민족 신화는 오랜 세월 운문의 형식으로 전승돼 왔기에 대부분 길고 흥미로운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런 소수민족의 문화적 힘에 주목해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일궈낸 최초의 인물이 영화감독 장이머우(張藝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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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4년 광시좡족(廣西壯族)자치구의 구이린(桂林)에서 <인샹류싼제(印象劉三姐)>라는 대형 야외공연을 연출했다. 구이린의 아름다운 산과 물을 무대로 삼은 공연의 형식도 독특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소재였다. ‘류싼제’는 좡족 전설에 등장하는 노래의 여신이다. 류싼제의 전설을 중심으로 그 지역에 거주하는 여러 소수민족의 문화를 작품 속에 집어넣은 것이다. 공연은 큰 성공을 거뒀고, 이후 이어지는 <인샹> 시리즈의 신호탄이 됐다.

물론 이후에 전국적으로 비슷한 공연들이 생겨나면서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소수민족 문화를 소재로 했지만 여러 민족의 신화나 습속을 섞어 오락적 요소를 강조하다 보니 소수민족 고유의 특징은 살리지 못한 채 상업화에만 몰두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그러나 장이머우가 신화나 전설을 포함한 소수민족의 문화를 산업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사람들의 폭발적 관심을 이끌어낸 첫 인물이라는 점은 부정하지 못한다. 소수민족 신화가 가진 ‘이야기’의 힘에 주목해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을 끄집어내고, 거기에 상상력을 덧붙여 중국을 대표하는 공연작품을 만들어낸 건 그가 창의적인 감독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신화의 세계엔 저작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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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수민족들이 갖고 있는 신화의 양은 엄청나다. 그 안에는 수많은 영웅의 신화, 반짝이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창세신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혜가 들어 있는 자연신화 등 다채로운 신화가 전승되고 있다. 게임이나 드라마, 영화를 막론하고 탄탄한 서사구조 즉 ‘이야기’는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가장 기본적인 힘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장편 서사구조를 가진 중국 소수민족들의 신화는 상당한 문화적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그 안에서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보다 더 풍성한 ‘스토리’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하나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중국에 거주하는 한족의 신화를 비롯해 소수민족들의 신화를 우리는 뭉뚱그려 ‘중국 신화’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신화의 세계에는 국경이 없다. 중국에 거주하는 여러 민족이 전승하고 있는 그 많은 신화의 저작권이 ‘중국’이라는 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아바타>나 <토르>, <퍼시잭슨>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신화의 모티브들은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라고 해서 그리스 사람들만 그것을 가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예술가, 작가들이 그리스·로마 신화를 소재로 해 작품 활동을 하며, 문화산업에 응용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중국 신화’라고 해서 중국 사람들만 그것을 가공할 권리를 갖는 것은 아니다. 고대로부터 전승돼 온 신화에는 저작권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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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거주하는 다양한 민족의 신화를 ‘우리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관심의 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상상의 공간을 축소시키는 행위다. 우리 것은 물론 소중한 것이지만 우리 것만이 소중한 것은 아니다. 눈을 들어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봐야 한다. 오래된 교역로인 육상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 등을 통해 일찍부터 물자가 오고 갔지만 그 길을 통해 사람도, 이야기도 오고 갔다. 버드나무 여신의 신화는 주몽의 어머니 유화(柳花)의 이름에도, 만주의 삼신할머니 신화에도, 페르시아의 여신 아나히타의 신화에도 두루 나타난다. 그러니까 그 오래된 교역로들은 ‘신화의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많은 신화들을 국가라는 경계 안에 가둘 필요가 없다. 경계를 뛰어넘으면 그 안에는 찬란한 신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거대한 문화 콘텐트의 보고가 그곳에 있는데 우리 스스로 문을 잠가버릴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신화는 과학이자 철학이다

신화는 인류의 지혜가 집약된 과학이자 철학이다. 신화와 과학은 아주 거리가 먼 것 같지만 사실은 놀라울 정도로 가깝다. 예를 들어 어둠과 빛, 즉 흑과 백의 대립을 보여주는 신화에서 강력한 힘을 먼저 보여주는 것은 빛의 신이 아니라 어둠의 신이다. 생각해 보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정의의 사도가 이기는 경우를 봤는가? 강한 어둠의 세력에 의해 온갖 고생을 다하던 주인공이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승리하지 않는가. 영웅신화에서도 영웅은 언제나 어둠의 세력에 의해 고초를 당하다가 마지막에야 이긴다. 왜 그렇게 어둠의 세력은 힘이 강한 것일까? 우주를 구성하는 96%가 차가운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신화에 등장하는 어둠의 세력이 그렇게 힘이 강한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신화는 또한 철학이다. 문자의 세계에 매몰돼 살아가는 우리는 문자가 없는 세계의 사람들이 전승하는 서사시나 신화 등을 ‘고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전’은 언제나 문자로 쓰인 ‘문헌’이어야만 한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문자를 갖지 않은 채 살아가는 오래된 민족들이 있고, 그 민족들은 눈빛이 형형한 사제들의 입을 통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오래된 서사시를 전승한다. 그 민족의 역사와 신화·종교·법률·경제·문화 등 모든 것이 그 안에 들어 있다. 그것은 그들의 ‘고전’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환경 문제로, 경제적 불평등 문제로, 지나친 성장 추구로 방향을 잃어버린 채 깊은 병을 앓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메시지들이 들어 있다. 고대의 지자(智者)들이 들려주는 낮은 목소리가 그 안에서 여전히 큰 울림을 준다. 특히 국가를 이루지 않은 채 마을 단위로 살아온 여러 소수민족이 전승하고 있는 신화에는 그 오래된 지혜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것은 새로운 담론의 구축을 가능케 한다. 길 너머를 보여줄 수 있는 대안을 담고 있는 철학,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여러 민족들의 신화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길어올려야 할 것은 바로 그것이다.

4차 산업혁명에 영감 줄 동아시아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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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신화는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풍성한 상상력의 원천으로서 작가에게 영감을 주기도 하고, 문화상품으로 가공돼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창출해내기도 한다. 역사학이나 고고학과 결합되면서 민족이나 국가의 기원을 끌어올리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며, 때론 기업문화에 적용돼 창의적 경영을 가능케 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여러 민족들의 신화는 궁극적으로는 지혜의 결정체다. 풍성한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그 오래된 ‘지혜’를 톡톡 튀는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IT의 틀에 담아낼 수만 있다면 그것은 문화적으로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담론의 형성을 가능케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새로운 담론은 4차 산업혁명 같은 것에도 깊은 철학적 영감을 주게 될 것이다. 증강현실이 눈앞에 펼쳐지는 지금 인간과 동식물, 심지어 사물까지 동등한 가치를 지닌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동아시아 신화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과학 및 철학과 만나게 돼 있기 때문이다.

김선자

중국신화학자. 연세대학교 중국연구원 전문연구원. 신화와 역사의 관련성에 관한 연구와 더불어 동아시아 여러 민족의 신화가 갖고 있는 다양한 문화적 맥락에 대한 연구와 강연을 하고 있다.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신화』 『오래된 지혜』 『김선자의 이야기 중국 신화』 『중국 소수민족 신화 기행』 등의 저서가 있다.

김선자 연세대 중국연구원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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