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고아들 눈에 밟혀 한국에 되돌아왔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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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끝났지만 황폐한 서울에 남겨둔 전쟁 고아들이 눈에 선해 한국에 되돌아왔습니다."

정전협정 체결 50주년을 기념해 22개국 1천여명의 한국전 참전용사가 한 자리에 모인 25일 밤 서울 남산 하얏트호텔 그랜드볼룸. 미국 참전용사 컬리 B 크넵(70)에게 한국은 남의 나라가 아니라 제2의 고국이다. 미군 소령으로 예편해 군 회계 관련 사업을 하던 그는 1987년부터 아예 한국에 정착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18세 소년 병사(이병)로 한국에 왔던 그는 제5전투연대(RCT) 소속으로 한국 전쟁사의 마지막 전투로 기록된 중부전선 금성전투(53년 7월 13일~7월 20일)에 참가했다. 하지만 그의 뇌리에 각인된 한국전의 기억은 치열했던 전투보다 전쟁 고아들이었다.

크넵이 소속된 제5전투연대 공병대는 53년 5월 서울 마포구 난지도에 3백명의 전쟁고아들을 수용할 수 있는 삼동보이스타운(현 상암동 삼동소년촌사회복지법인) 기숙시설을 건설했다.

이들은 귀국한 뒤에도 제5전투연대 한국전 참전용사회를 설립해 현재는 상암동으로 자리를 옮긴 삼동고아원을 계속 후원해 왔다.

특히 크넵은 제5전투연대 참전용사들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으로 돌아온 뒤 89년에는 현재의 한국인 아내(39)와 결혼해 경기도 평택에서 살면서 고아원을 계속 후원해 왔다.

"전쟁 때와는 눈에 띄게 달라진 한국의 아름다운 거리와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그는 "하지만 한국으로 다시 이끈 것은 전쟁 때 인연을 맺은 삼동고아원인 것 같다"고 말했다.

또 한 명의 참전용사 프레드 심슨(72)도 '서울 시민'이다. 그는 한국 남자와 결혼한 막내 딸 가족들과 함께 95년부터 용산구 후암동에 살고 있다. 독일에도 다른 딸이 살고 있지만 한국전쟁에 참전한 인연으로 한국이 좋아 여생을 보낼 나라로 택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정전협정 체결 직전까지 벌어졌던 '철의 삼각지대'전투를 잊지 못하는 그는 "포크찹 전투, 리퍼(Ripper)작전 등 휴전 직전의 전황이 가장 치열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전쟁 당시 완전히 파괴됐던 한국이 지금 모습으로 발전한 데 대해 한국인 못지 않은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날 '참전 용사들을 위한 감사의 밤(Salute to Hero)'행사를 주최한 주한 미국 연합봉사기구(USO Korea) 측은 "크넵.심슨 등 모두 8명의 참전용사가 한국으로 돌아와 정착해서 살고 있다"면서 "이들이야말로 참전 용사들의 한국 사랑을 보여주는 산 증거"라고 밝혔다.

정전협정 체결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했던 로버트 J 베리(72)의 경우 대를 이어 한국에 근무하는 경우. 손자 스티븐 베리(23)가 지난 4월부터 주한 미군 평택 공군기지 캠프 험프리에서 근무하고 있다.

로버트 베리는 "나는 50년 만에야 한국을 다시 찾았지만 이제는 손자가 내 자리를 대신해 든든하다"고 말했다. 손자 스티븐도 "할아버지가 참전한 나라여서 더욱 더 친근감을 갖고 있다"고 화답했다.

정효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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