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 아메리카나 실현되나] "美일방주의, 외로운 괴물 될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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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 있는 정치재단 이사장 뱌체슬라프 니코노프 박사는 정부 밖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정책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신세대 그룹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러시아 사회에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부터 1956년까지 소련의 유명했던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외손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라이스 독트린이라는 것을 소개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에 반대한 유럽의 3강 중에서 프랑스는 반드시 응징을 하고, 독일은 무시해버리고, 러시아는 용서해준다는 것이 백악관 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의 노선이라는 것이다. 미국에 꼭 같이 미운 털이 박힌 세 나라 중에서 러시아가 너그러운 대접을 받게 된 데는 그만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 프랑스 응징, 러시아는 용서

첫째, 부시와 푸틴의 개인적인 관계다. 9.11 테러가 났을 때 외국인 국가원수로는 푸틴이 부시에게 가장 먼저 위로의 전화를 걸어 테러 응징에 협력을 약속했다. 푸틴 나름으로는 9.11 테러조직과 러시아의 체첸 반군을 한 묶음으로 엮어 체첸 반군 강경진압에 대한 미국의 인권 시비를 차단하는 효과도 노렸다.

둘째, 아프간 전쟁 때 푸틴은 미국이 중앙아시아의 옛 소련 공화국들인 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의 군사기지를 사용하는 데 반대하지 않았다. 미국은 아프간 전쟁이 끝난 뒤 러시아의 앞마당이요, 중국의 뒷마당인 중앙아시아에 아예 눌러앉아 버렸다.

셋째, 미국은 '이라크 이후'의 중동과 중앙아시아 질서 개편에 러시아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 연안의 석유자원 개발을 둘러싼 미국과 유럽의 경쟁에서 텍사스에 근거를 두고 부시가(家)와 가까운 에너지기업들이 주도권을 잡는데도 러시아의 지원이 중요하다.

넷째, 부시 정부는 프랑스와 독일.러시아를 차별대우함으로써 유럽을 분열시키려고 한다는 것이 지난 두번의 대담기사에서 소개한 윌리엄 파프와 테오 조머의 견해다.

니코노프는 더욱 놀라운 말을 했다. "미국이 중앙아시아에 군사적인 교두보를 갖는 것은 러시아에도 이익이 됩니다. 미국의 군사적인 존재는 과격한 이슬람 세력의 러시아 진출을 차단해줘요. 미국의 지원으로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번영하게 되면 그것 또한 러시아에는 크게 플러스가 됩니다."

카네기평화재단 모스크바 지부의 릴리아 셰프초바 박사는 최근에 출간한 '푸틴의 러시아'로 유명하다. 그녀는 카네기평화재단이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음을 전제로 말문을 열었다. "부시 정부는 지난 1백년을 통틀어 최고의 외교안보팀을 가졌는데 이라크를 침공한 뒤에는 줄곧 대량살상무기 찾는 데만 정신이 팔려 후세인 이후의 이라크에 대한 청사진을 준비하지 못했어요. 미국은 이라크에 친미적인 독재정권을 세울 거예요."

셰프초바도 니코노프 같이 중앙아시아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을 환영했다. "러시아는 너무 힘이 약해 미국의 군사적인 존재에서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돼요. 푸틴의 생각도 그런 걸로 압니다. 이라크가 안정되는 것도 러시아에는 유리한 사태입니다."

요르단의 암만은 중국이 개방되기 전 중국연구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홍콩 같이 이라크에서 밖으로 열린 중요한 창구였다. 1991년 걸프전쟁 이후 요르단대학 전략연구소가 세계의 주목을 받아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연구소의 하산 바라리 박사는 영국에서 공부한 촉망받는 젊은 엘리트다.

바라리는 영국과는 달리 미국은 이라크 사회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결과 전쟁을 쉽게 끝내고도 혼돈(Chaos)에 가까운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분별없는 신보수파들은 이라크의 현실을 잘못 알고 있어요. 이라크인들은 전쟁이 끝나고 후세인이 사라졌는데도 혼란이 계속되는 걸 이해하지 못해요."

바라리는 이라크 전쟁 후 중동지역에는 민주화의 도미노가 아니라 공포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내일 총선거가 실시되면 분명히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승리할 겁니다. 원리주의는 빈곤에서 비롯돼요. 민주화를 강요하면 실패를 자초합니다. 대대적인 마셜 플랜과 병행되는 민주화라면 몰라도."

*** 중동에 '공포 도미노' 현상

암만의 중동문제연구소 자와드 알하마드 소장은 미국이 친구의 말도 안 들으려고 해서 화를 불렀다고 말했다. "미국은 이라크나 다른 중동국가에서 자유민주주의 따위에는 관심 없어요. 민주주의라고 무리하게 이름붙일 만한 미국식의 정치제도면 만족할 것입니다. 미국은 이라크에 세울 정부가 반미 정부가 아니고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이 확인되고 미군 주둔에 합의한 뒤에 이라크를 떠날 거예요. 미국이 이라크 총선거의 감시를 유엔에 맡기느냐가 하나의 시금석이 됩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산뜻하게 승리로 끝냈다. 후세인의 두 아들을 사살한 것은 전후 처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의 전쟁 목적은 후세인 제거와 친미정권 수립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은 불안한 중동정세를 개편해 작게는 테러조직의 온상을 파괴하고 크게는 유라시아 대륙의 전략적 요충이요, 세계 최대 에너지의 보고(寶庫)를 아무도 넘보지 못할 미국의 세력권으로 만들자고 전쟁을 했다.

중동국가들은 사태를 관망하고 유럽은 반발한다. 부시의 단독주의는 19세기 미국 외교의 기조를 이룬 저 '명백한 천명(天命)'을 방불케 한다. 19세기의 미국은 매수와 전쟁으로 루이지애나와 뉴멕시코와 캘리포니아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국토 확장은 신이 미국에 부여한 사명이라 믿고 자유.평등.민주주의를 전세계에 전파하라는 신의 명령을 외교의 기조로 삼았다.

북핵 위기가 복잡한 것도 부시 정부의 정책에 '명백한 천명'같은 메시아주의와 핵확산 방지라는 현실적인 요구가 뒤섞인 탓이다. 이라크 전쟁의 승리는 시작에 불과하다. 신보수파가 주도하는 일방주의가 계속되면 미국은 외로운 괴수(怪獸)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유럽 지식인들과의 대화에서 받은 인상이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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